『한국교회의 역사』를 말한다

Posted 2008. 3. 6. 23:0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서정민 저,『한국교회의 역사』, 살림

. 한국기독교의 수용과 갈등
. 한국기독교의 전환과 모색
. 한국기독교의 저항과 굴절
.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성장
. 한국기독교의 참여와 성숙


1. 프롤로그

  이따금씩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 교회의 허물을 접한다. 물론 모든 한국교회를 질타하는 식은 아니고, 주로 대형교회가 도마에 오르곤 했던 기억이 남는다. 같은 맥락에서 얼마전 MBC 시사프로그램 '뉴스 후'는 세차례에 걸쳐 중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방송 역시 꽤 넓은 공감대를 형성한 것을 보면, 아직 병폐는 온존하나보다.
 
   일부 교회들의 반발은 어김없이 이어졌는데, 공박하고픈 심사가 반박할 여지보다 한참 앞서나가는 모양이다. 어느곳을 뒤져봐도 이들을 지지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교회내부에서조차 진지한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를 높이는 마당에, 그 외부에서 우군을 찾기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들은 강했다. 'MBC민영화추진'이라니.

  한국에서 교회는 '권력'이다. 4명중 한 명꼴의 그 엄청난 신자수도 그렇지만, 이들은 이미 거대 조직으로서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발을 걸치고 있다. 한 세기만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성장을, 또 그 만큼의 힘을 얻게 된 한국의 교회. 딱딱한 이름을 내걸었지만『한국교회의 역사』는 한국기독교의 지난 백여년사를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한국교회' 대체 넌 뭐니.


2. 민족과 프로테스탄트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는 갈등과 타협이 혼재한다. 가령, 혹자는 근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두고 전자의 일방적인 승리를 말하기도 하지만, 자본주의가 근대체제의 적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대립항을 녹여다가 제몸에 붙여낸 점이 한 몫을 차지한다. 갈등과 타협은 어디에서고 일방적이지 않다. 한국 민족공동체와 기독교의 만남은 일방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즉, 서구에 대한 경계가 날로 심해지던 19세기 말엽 조선에서, 카톨릭이 '반민족적' 성격에서 수난을 당한 측면이 갈등의 한 표상이었다면, 프로테스탄트가 이른바 카톨릭과의 '이체선언'(異體宣言)을 통해 그 차이를 부각시켰던 점은 타협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니까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카톨릭보다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족공동체와의 관계맺음이 비교적 성공적이었다는데에 있다. 반민족의 혐의를 벗은 프로테스탄트는 비 서구국가(일본)의 침략이라는 조건아래 '서구세력에 의한 일본 견제'라는 차원에서 민족공동체와의 결합이 보다 쉬울 수 있었다. "이는 세계기독교 확장사에 있어서 유일한 경우"(19쪽)였는데, 서구제국주의가 침략한 제3세계보다 선교의 수용폭이 컸던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달리 이를 방증하는 것은, 3.1운동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위치인데, 당시 교회는 '운동동력의 통로'이자 '운동이후의 수난감수'(24쪽)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민족교회로서의 의미를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렇지만 선교와 교세의 확장과정에서 모든 교회가 민족문제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오히려 몰역사적인 인식아래 지나치게 묵시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교파도 있었고, 일제의 강압이 심해질수록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조장하기도 했다. 일제 파시즘이 강화되었던 그 엄혹한 시기에 혹독한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사실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할수도 있지만, 신사참배나 천황숭배에 앞장섰던 일부 교회는 종교신념체계가 철저히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종교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기에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더욱이 이 교회들은 한국 기독교회의 주류였다.

  일부 소수 기독교는 일제에 저항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철저한 신앙적 논리에 의해 저항주체로 떠올랐다. '민족'이 아니라 '신앙'이 운동력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들의 저항이 민족의식의 발로로 표면화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한국기독교 저항자들의 동기는 순수한 신앙적 발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서는 한국 민족주의의 반일의 현상으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54쪽)

  이 대목에 특별히 시선이 가는 이유는, 이와 같은 순교적 저항이 해방 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족의식으로 탈바꿈하지 않았나 하는 혐의 때문이다. 하나의 억측에 지나지 않지만, 신앙을 강조하는 보수 기독교가 한국교회의 주류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에는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영향아래 높아진 기독교의 위상, 박정희정권을 거치면서 '민족'담론이 확대재생산 되었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순교적 저항과 민족적 저항의 치환에서 말이다.


3. 기독교의 부흥, 부흥한 교회

  교회의 본격적인 부흥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5년까지 이루어진 '복음화운동'이라 전해진다. 꽤 오랫동안 인구대비 5%정도에 머물러 있던 신자비율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25%로 뛰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비약적인 성장은 북에 있던 많은 신자들이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신자의 수가 직접적으로 증가한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쟁의 후유증이 작용한 결과에 주목할만 하다. 전쟁은 주류 보수 기독교의 철저한 '반공이데올로기'를 형성케 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기독교'(75쪽)로 재편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주류 기독교에게 결속을 다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전쟁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협을 직접적으로 체험케 했던 점 역시 교회 부흥에 한 몫 했다.

  그런데 기독교의 부흥 이면에는 교파간의 분열이 있었다. 기독교 수용초기 선교사들이 구획을 나누면서 신학의 차이가 고착되었던 점에 이데올로기 문제가 더해지면서 첨예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전체의 몸집이 불어났다고 해서, 다양하게 나뉜 교파 모두가 동일한 성장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교회의 부흥과 부항한 교회는 같은 모양새가 아니었던 것이다.  

 
4. 낮은 위치의 교회란..

"기독교가 사회의 기득권을 지니거나, 우대 혹은 존중받는 일이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중요한 사회적 비판 기능을 상실하고 올바른 가치의지표나 도덕적 향도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86쪽)


  민족과의 관계설정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열된 교회의 모습에서 정치적 영역과 교회의 관계는 읽힌다. 한국교회가 권력으로 기능할 수 있는 여건은 여기에서 발생했나보다. 어차피 이렇게 교회가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라면 그 권력이 어떠한가를 묻는 것이 현명하다. 저자의 지적대로 교회가 사회의 기득권을 갖는 것이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교회 본연의 기능을 감당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렇지만 또 다시 책에 담긴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기독교는 오히려 낮은 자의 위치, 수난받는 자의 위치에서 역사적 역할을 감당할 때 본래의 정신에 맞는 기능을 다할 수 있었다."(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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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쫓길 일이 있다보니 애초의 의도와는 많이 틀어져버렸네요.
또 되도록 말랑말랑하게 쓰고 싶었는데 이것도 역시나 대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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