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Posted 2008. 3. 6. 10:4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기타를 잡고 튜닝을 한다.

불안하다.

기타를 놓는다.

나의 문학은 영원히 튜닝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 P50




기형도 전집을 살 총알이 없어 집어든 헌책.
갱빛 종이들 사이에 성마른 장밋닢 두 장이 끼워져 있었다.


고등학교때 기형도를 읽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기형도의 감수성을 갖고도 서른 넘어서까지 바득바득 살아낼 것이라고. 그만큼 (그의 글빨에 대해서는 묵념하더라도) 그의 정서와 내면의 향기는 신기할 정도로 나를 닮았다. 보통 잠시 스쳐지나가는 단상이나 감정상태를 관념어 잔뜩 넣어 썰푼 일기류의 수필은 도저히 지겹기 마련인데 이 사람의 글은 꼭 내 글 같아서 눈을 놓지 못하겠고 또 그래서 짜증난다.

여기서 내 글 같다는 불초함의 근거는, 기형도의 글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화려한 글빨 속에 벌겋게 벌어져있는 기형도의 허점과 한계에 있다. 젊은이들 중 일군이 기형도를 적잖이 추모하는 것도 다름아닌 그 ‘모자람’의 표현이 문학적 성취를 거두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욕망이 거세당한 인간의 필연적 도피가 매저키즘이라지만 나의 의존적 절대가 결코 외부에 존재하거나 설령 존재하더라도 나의 시야에 포착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마지막 오기처럼 잔존하므로 참혹한 아나키즘에 걷잡을 수 없이 말려들어(P43)" 같은 무차별 불친절 만연체에 섣불리 공감해버리는 내 자신이, 또 이런 글을 남기고 보란듯이 죽어버린 요절작가가 두릅으로 엮여 똑같이 측은해지는 것이다. 기실 자기 속에 도사린 모자람이란 그 얼마나 뼈저린 것이던가.


더불어 “편법으로서의 (시의) 해답은 그러한 상황을 ‘인식함’에 있을 뿐이며 독자가 그것을 인식한 이후의 결정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며 그렇게 될 때 시인은 독자의 미혹적 수준으로 걸어내려가 겸손하게 되며 그러한 겸손이 공감대 형성의 큰 힘이 될 것이다.(P55)” - 이런 부분에서도 기형도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무엇을 인식시키는 것 자체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 이후의 것을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는 것, 또 그것이 스스로도 밝히듯 '편법'이며, 또 그것이 필요 이상의 '겸손'을 낳게 된다는 것. 386세대 이후 한국의 모든 젊은이들은 이 문제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한계이기도 하다. 시쳇말로 그것만으로도 “되다”. 현실을 살면서 현실 너머를 꿈꾸는 능력은 유사시에 가장 먼저 정리해고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겸손이니 공감대 형성이니 감수성이니 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본인 것이고, 그 기본은 바깥으로 꺼내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저 말은 현실에 허덕이다 마지막 카드로 내놓은, 현실에 대한 백기선언에 다름아니다.


사실 시라는 게 그렇다. 더듬어보면 우악스레 뜯겨나간 자리에 드러나지 말아야 할 '기본'이 애처로이 드러나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시’의 공통된 형상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쯤 되면 시는 믿을 수 없어도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은 믿을 수 있더라는 친우녀석의 말에 십분 동감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 '의존'하는 예술은 그만큼 그 역량이 누수되기도 쉽다.



 


기형도 자네는 말을 아끼라. 너의 感傷은 시로써 족하다. 왜냐하면 시적 감상은 최소한 적어도 절제로써 은폐된 것으로 감동을 위한 매개체이므로. - P83


슬픔은, 숨기며 감추어야 하는 감정임을 나는 지금 사무치게 느낀다. 
 - P13, 기애도씨가 쓴 서문 중.




군입대, 전역 상간에 쓴 글이 많아서 갓 전역한 사람이 읽기에 좋다. 조병준과 성석제와 황경신과 놀아났던 복학생 기형도의 체취를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추천. 앞으로도 측은한 무위無爲를 살아내야 할 예비역들에게 좋은 반려가 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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