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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16 비합법적 사랑과 사치가 자본주의를 발생시켰을까 - 사치와 자본주의


1. 들어가며

  현대 사회의 기본원리를 크게 나누어 본다면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원리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첨단 과학기술이 더해져 현대 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추동해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혁명을 통해, 과학기술은 몇 번의 큰 과학혁명 - 패러다임의 전환 - 을 통해 이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장원리를 기반으로 한 이 사회의 자본주의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의문이 생긴다. 혹자는 시장은 인류의 역사와 언제나 함께해 왔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중세의 상업자본주의에서 해외 무역과 같은 요소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산업자본주의로, 이후 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해 왔다고 말한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청교도적 예정설과 금욕주의가 자본주의 발달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른 설명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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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좀바르트 지음 | 문예출판사 펴냄
성과 사랑,연애라는 독특한 관점에서 사치의 경제사적의미와 사회문화사를 파악한 저서. 십자군 전쟁이후 변화된 남녀관계가 지배계급의 생활양식 전체에 미친 영향과 이로 인한 사치풍조가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는 저자의 독창적 시각이 흥미있게 펼쳐진다.

  이 책의 저자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Zombart, 1863~1941)는 독일의 경제학자이며 사회학자로, 매우 독특한 시각으로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사치 풍조’로부터 왔으며, 이 사치는 바로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원래 이 책은 『사랑, 사치와 자본주의』라고 제목을 붙였어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책의 목표는 유럽 사회가 십자군전쟁 이후 남녀 관계가 변화하였고 이에 따라 지배계급의 생활양식 전체가 새롭게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근대적인 경제체제의 형성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5) 좀바르트가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발생 원인에 대한 논리와 함께 이것들이 시사하는 것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 사랑과 사치, 그리고 자본주의의 탄생


  2.1. 새로운 사회

  궁정생활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지닌 것은 바로 프랑스에서의 근대적 궁정의 형성이었다. 프랑스 궁정의 창시자는 프랑수아 1세로 그는 여성을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함으로써 궁정을 만들었다. 또한 궁전과 축제에 형식의 화려함을 주어, 여자와 함께 음모, 정사, 사치가 발생하였다. 좀바르트는 두 명의 기록을 인용하여 당시 귀족들이 놀이와 낭비, 몸치장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고, 귀부인들이 의상, 예절, 유행, 장식, 기호 등을 만들어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 초기의 부는 오로지 ‘토지소유’였으나 13~14세기 이후 해외무역이 활발해지고 광산 등을 개발하면서 화폐재산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후 무역과 약탈, 노예제도를 통해 유럽 여러 나라들은 부를 형성했고, 16~17세기에 들어서야 금융업이 활성화되어 비로소 ‘시민’에게도 부가 형성될 수 있었다.

  여기서 부를 축적한(벼락부자가 된) 시민들은 (1) 공적을 세우거나 상응하는 돈을 바침으로써 귀족 칭호를 받거나, (2) 세습귀족과 관련이 있는 훈장이나 관직을 받은 경우, (3) 세습귀족의 토지를 획득한 경우 신분 상승이 행해질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일들처럼 결혼을 통해 세습귀족(오늘날에는 정치권력)은 돈을 얻고, 벼락부자들은 명예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세습귀족들도 처음에는 상인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던 평민들과의 결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영국의 가장 하위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젠트리에게 있어서 계급의 경계를 그 아래 계층과 관련해서 전혀 정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영국에서 귀족의 일원이 되는가 아닌가는 말하자면 경제사정의 변화에 의해 자동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p.26).


  2.2. 대도시

  16세기 이후 유럽 각지에서 도시 거주자의 급속한 증가로 “대도시”가 탄생했다. 따라서 도시가 무분별하게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여러 칙령들이 만들어졌으나, 이는 아무 성과도 없었다. 오히려 도시는 더 강력하게 성장하였다. 저자는 칸틸롱(Cantillon)의 연구를 언급하며 도시의 작은 집들은 큰 집(귀족, 정부 등)의 지출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논리를 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중농주의자들에 의해 명확하게 발전되었다. 도시는 생산보다는 소비의 역할을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따라서 국가수입의 상당액이 (대)도시에서 소비된다면 사치문제가 대도시문제와 결합될 수 있다. 또한 프랑스의 베카리아(Beccaria)에 의하면 귀족들이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고 노동계급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입법 기관 근처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향락영역을 확대하는 한편 권력도 확대하였다.


  2.3. 사랑의 세속화

  좀바르트의 독특한 논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근대자본주의 발생에 있어서 중세부터 18세기까지의 남녀관계의 변화가 가장 중요했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중세에는 세속적인 사랑의 감정이 종교의 영향으로 초세속적인 목적으로 그 방향이 돌려졌거나, 사랑이 제도적으로 구속되어 결혼은 신이 원하고 축복한 제도로서 인정되었다. 따라서 “신이 축성하지 않거나 제도적으로 구속되지 않은 성애는 모두 ‘죄’의 낙인이 찍혔다.”(p.74) 그러나 11세기 이후 “연가”를 부르는 음유시인들이 등장하였으며, 14세기 말기가 되어서는 특히 예술 분야에서 여체의 내적인 아름다움이 발견되고 감각적인 사랑을 맛보게 된다. 시인들은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라 하며,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 시기에는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을,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生)는 것을 의미하였다.

  13세기 이후 나타난 여성과 사랑에 대한 쾌락주의적이고 미학적인 견해는 당시 종교적·제도적 속박과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을 가져온다. 사랑의 본능은 그 성질상 비법률적인 것이라 결혼과 같은 제도에 의해서 속박당하지 않는다.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의 특성이 사회적인 제도에 의해서 그 매력이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몽테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랑과 결혼은 무관하며, 오히려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혼에 있어서는 인척관계와 재산이 더 중요하며 결혼은 자신만큼이나 자신의 가족과 자손을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아름다움과 사랑의 노력을 결합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결혼과 사랑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현대에만 나타난 유일한 특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유연애의 관념은 혼외의 성관계가 부부간의 성관계를 보충해 주는 것으로 인식되게 하였다. 따라서 간통이 사실상 인정되고, 대도시에서는 매춘이 성행하게 되었다. 여기서 좀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은 ‘비합법적인 사랑’이 만연됨에 따라 ‘정숙한 여성’과 ‘창녀’ 사이에 새로운 계층의 여성이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을 통해서 자유로운 기교가 된 사랑이 사랑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에게 위임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궁정에서는 궁녀들이 하나둘씩 군주로부터 시작해서 궁정인의 애첩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고급창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애첩경제”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애첩들은 공식적으로 왕의 연인들로 인정받아 ‘귀부인’으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이는 당시 상류사회를 동경하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이러한 위법행위의 정당화는 궁정 밖에서의 자유로운 연애관계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궁정과는 관련이 없는 고급창녀가 출현하였다.

  마찬가지로 17, 18세기에는 런던과 파리에서 근대적인 창녀(이 책에서의 창녀의 의미는 직업적으로 성을 매매하는 것 보다는 혼외 관계에서의 첩 혹은 애인의 의미가 더 강하다)가 대대적으로 나타났다. '아내 이외의 우아한 여성'을 두는 풍습이 일반화됨에 따라 궁정의 귀족들뿐만 아니라 신흥 부자들에게서도 첩을 두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간통에 의해서 초래되는 비용이 상당한 재산가의 생활비 중에서도 최대의 액수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고급창녀들이 사회적으로 대두됨에 따라 품위 있고 신분이 높은 여성들의 취향도 이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들도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기 애첩들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2.4 사치의 전개

  좀바르트에 의하면 사치는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모든 소비를 뜻하며, 필요한 것은 인간의 생리적인 필요나 문화적인 필요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사치는 양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으며, 질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다. 질적인 사치라는 것은 더 좋은 질의 재화를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바로 사치품이다.

  모든 개인적인 사치는 우선 오감을 통한 쾌락을 감각적으로 즐기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것들은 어떤 종류의 일용품 속에서 표현되며, 이렇게 우리의 감각을 자극시키는 수단들을 세련화하고 그 수를 늘리고 싶은 것은 결국 우리의 성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저자는 그 이유를 감각의 즐거움과 성애는 결국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부가 축적되고 성생활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것이면 사치도 유행하고, 성생활이 위축되는 곳에서는 오히려 재화를 쓰는 데 이용하지 않고 축적하는데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사치가 일단 존재하면 사치를 더욱 증대시키는 수많은 동기들이 활기를 띠게 된다. 즉 남보다 뛰어나려고 하는 충동이 중요한 요인으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치는 화려한 생활과 애첩들을 위해서 궁정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궁정에서 행해진 사치는 궁정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점차 퍼졌다. 좀바르트는 다음으로 사치수요를 양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신흥부자들의 역할을 주목하게 된다. 그는 사치를 만들어내는 두 가지 원동력으로 명예욕과 감각의 즐거움을 들고 있다. 게다가 평민의 출세와 사치품수요의 확대 간의 밀접한 관계는 유럽 국가들의 ‘번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14, 15세기의 이탈리아, 15, 16세기의 독일, 17세기의 스페인과 네덜란드, 18세기의 프랑스와 영국을 들 수 있다. 근대사회에 있어서 부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으며 막대한 재산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 외에는 자신들을 부각시킬 수 있는 특성을 가진 벼락부자들이 이러한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을 세습귀족들에게 전하게 된 것이다. 세습귀족들은 사치지출에 있어 평민출신 벼락부자들과 경쟁하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세습귀족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대자본가와 결혼으로 인척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치의 주체가 신흥부자이더라도 당시는 귀족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고, 따라서 사치의 지향이나 성질은 귀족적이었다. 당시의 사치는 옷사치 등 그 방향을 귀족이 결정하였으며, 그것이 어디에서나 고귀한 품위를 나타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바르트는 사치의 일반적인 발전경향을 실내화, 물화, 감각화와 섬세화, 집중화로 구분한다. 중세의 사치가 대부분 공공적이었던데 반해, 17세기 이후에는 사치가 사적인 것이 되어 가정으로 옮겨졌다. 또한 하인이 많은 것에 대한 강조는 사치의 귀족적인 기원을 드러내지만, ‘애첩’을 위해서는 하인을 많이 거느려 물적 재화를 많이 투입하는 것이 별로 이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성격(물화)이 약화되었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임금노동자의 발생을 촉진시켰고, 따라서 사치욕구의 물질화는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애첩’과 관련하여 사치가 예술과 같은 어떤 이상적인 삶의 가치에서 멀어져 본능에 점점 더 예속되게 된다. 이러한 사치의 감각화와 세련화 경향을 저자는 ‘귀여운 여인의 승리’라고 일컫고 있다. 사치는 이전의 주기적인 행사에서 벗어나 상시적이고 일상적인 제도가 되었다. 따라서 사치품의 소비가 빨라지고 사치품이 보다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요구되었다.


  2.5 사치에서의 자본주의의 탄생

  당시 사람들은 대체로 사치가 자본주의적인 경제 형태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각국의 정부들도 사치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당시 여러 학자들은 사치가 ‘악덕’으로 기능할 수 있는 양면성을 인정하지만, 그 ‘필요성’은 확신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은 사치보다는 ‘착실하고 분수에 만족하는 검소한 부르주아’의 윤리적 열정을 가지고 근대자본주의에 접근하였으며, 오히려 역사학파의 ‘판로와 공간적인 확대, 해외시장과 수출이 자본주의적인 조직을 필요로 하였다’라는 견해가 널리 인정받았다. 좀바르트는 주문생산과 원거리 판매를 살펴보면 수공업과 자본주의의 대조를 조금도 나타내지 않는다고 하며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좀바르트에 의하면 초기 자본주의산업의 매우 많은 부분은 사치라는 우회로를 통해 발생하였다. 사치품이 되는 최종 소비재까지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관련 산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는 명백한 사치산업은 특히 일찍부터 자본주의에 속하였고, 동종의 공업군에서는 사치품을 만들어내는 공업부문이 일반적으로 다른 부문보다 먼저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판로의 지리적인 확대 때문에 자본주의는 산업 활동을 지배하게 되었다”라는 지배적인 견해에 맞서, “강력한 사치소비의 형성이 산업생산의 조직에 대해서 미친 영향이 훨씬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있다(p.272). 대부분의 경우 사치품은 먼 곳에서 얻지 않으면 안 되는 비싼 원료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보다 부유하며 상인기질이 있는 사람에게 이익이 있었다. 또한 사치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더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자본력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했다. 또한 사치품의 판매는 경기변동과 유행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경기의 변동을 견디는 데에는 수공업보다 자본주의적인 조직이 훨씬 유리하였다. 마지막으로, 대량판매의 가능성이 있는 상품의 판매는 대부분의 경우 훨씬 나중에 가서야 나타났기 때문에, 재산가에게는 사치산업에의 투자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3. 나가며

  베르너 좀바르트의 “사치와 자본주의”는 성, 사랑, 연애(특히 비합법적인)라는 독특한 관점에서 사치의 경제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사적 의미까지 파악하고 있다.  이 책은 생산을 중시하는 주류 사회과학자들로부터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는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좀바르트는 사치에 대한 어떠한 가치평가를 내리지 않았기 이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한편 프로테스탄티즘의 검약정신이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하여 근대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논리를 편 베버와 비교하여 보면, 좀바르트의 주장을 더욱 흥미롭게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학자 모두 윤리나 정신(상부구조)이 경제적 구조(하부구조)의 발전을 촉진시킨 사례로서 맑스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유사한 점이 있다.

  아쉬웠던 점은, 좀바르트의 조사 과정에서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주체로 보고 남성 중심적인 관점에서만 서술해 나간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료, 남아있는 문헌이 주로 남성에 의해 쓰인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여성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귀여운 여성의 승리”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해도 그것은 여성을 대상화시켜서 본 것일 뿐 실제로 여성들의 지위나 권력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실제로 당시 여성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행위를 펼쳐 나갔는지 같이 살펴보았다면 더 좋은 연구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현대의 문제로 돌아오면, 이 책에서도 서술되어 있듯이 유럽은 제3세계를 착취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이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것도 ‘사치’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러면서 저개발 국가에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선진국들은 자유무역으로 지금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라는 신화의 뒤편에는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그래서 사라져버린 경제개발의 역사가 있다. 선진국들, 특히 영국과 미국은 국가의 강력한 시장 개입과 보호주의를 통해 지금의 위치에 올라서고는, 후진국들이 따라잡지 못하도록 자유무역과 시장 개입 금지를 강요하는 이른바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유현산,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인가”, 한겨레21, 655호). 자신은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꼬마와 본격적으로 결판을 내보자고 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따라서 자유무역을 표방하는 유럽 선진국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볼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 유럽 중심의 세계는 그들의 욕망을 위해 ‘아직도’ 저개발국들을 착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