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근대의 신학은 어떤 모습이어얄까 - [죽은 신을 위하여]

Posted 2008. 3. 9. 23:4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죽은 신을 위하여(양장본) 상세보기
슬라보이 지젝 지음 | 길(박우정) 펴냄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신이 죽은 사회, 다시 말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유형의 대의를 부정하며 소소한 쾌락을 누리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사회는 오히려 삶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탈형이상학적 생존지상주의의 끝은 먹기 위해 사는 삶, 죽음과 다름없는 삶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원제인 '


바야흐로 포스트-모던이다. 근대의 오만에 대한 성찰적 어쩌고 전지구적 시민사회의 구축이 저쩌고... 이제 우리는 근대적 합리성에 탈근대적 성찰성까지 갖추었으니 정말로 역사는 완결된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역사는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지구화에 수반되는 노동력의 자유로운 (노동자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는) 이동과 함께 노동계급 내에서의 인종차별과 증오가 확산되고 있다. '모던'의 한 축이었던 사회주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더더욱 심하다. 박노자가 지적하듯 "보통" 국민 국가로 돌아간 러시아에서는 비러시아인에 대한 끔찍한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헌팅턴 류의 문명충돌 얘기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슬람, 유대, 기독교에 공통되는 '근본주의'가 중동과 세계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주류' 개신교가 어떤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지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애저녁에 졸업했어야 할 민족, 종교 나부랑이가 다시 득세를 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왜 멋진 탈근대 세계가 야만으로 되돌아가는가?

혹은 이에 대처하는 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만들어진 신] 같은 계몽/소아병적 비판? 혹은 '개독까'의 예수천국 불신지옥 비난? (일단 "예수천국 불신지옥" 에 대한 고찰, 대한민국에 주류 기독교란 없다. 를 읽어보라) 아니면 그리스도의 희생을 잔인한 교의라고 공격하며 민중과 함께한 체 게바라 풍 혁명가 예수를 그려내기? 그도 아니면 '영성' - "모종의 근본적인 경험", "근본적인 타자성을 향해 스스로를 개방함으로써 뭔가 특별한 윤리적 태도를 획득하는 방식", "압도적인 향유의 형태를 경험하는 방식"(p.11) - 같은 고도로 세련된 자위행위?

지젝은 이런 질문에 대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뒤집어 "'신학'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한다"(p.5)고 잘라 말함으로써 '정면승부'를 시도한다. 역자가 지적하듯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의 혹은 이념은 이제 종교적 신념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이 유력한 이념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p.280)이며, 다시 말하면 "그러니까 믿어 안 믿어?" 라는 '저속한' 질문 (p.11)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젝의 주장은 명확하다. 기독교의 교의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 보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쪽)

주체로부터의 초월이란 교리를 통해 파시즘에 동원되거나 서양에서 취향으로서 소비되는 불교, '세속적' 쾌락을 보장해 주는 현행 기독교("너는 욕망에 마음껏 탐닉하며 삶을 즐겨도 좋다. 내가 이미 그 값을 치렀으니!" - p.83), "본연의 인간의 잔여"로서의 유대인·유대교를 차례로 비판하며, 지젝은 진정한 기독교 -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적 접근 - 적 경험만이 적절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타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의 핵심은 신 자체의 분열/균열이다. 타 종교에서 신과 영원의 세계는 인간과 분리되어 있으며 죽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내세로 그려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은 스스로 '타락'을 자초한다.

인간이 신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신이 인간을 신 자신에게서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 자체에 이러한 분리가 반영되어 신이 신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하는 것이다. (p.26)

전형적인 무신론에서 신은 더 이상 자기를 믿지 않는 인간들에 대해서 죽는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신은 신 자신에 대해서 죽는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도가 범할 수 있는 궁극의 죄를 범한다. 믿음(Faith)이 흔들리는 죄. (p.27)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 신이 바로 이 균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는 균열에 의해 인간과 분리된 피안의 신이 아니라, 균열 자체, 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다.
(p.42)

죄악을 저지른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희생양으로... 운운의 신학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어(타락하여) 신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 그리고 그 타락 속에 구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타락은 사실 전혀 타락이 아니라 '자체로' 타락의 정반대, 자유의 출현이다. 타락 이전의 순수 상태는 없다. 타락 이전은 그저 어리석은 자연적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과거의 '보다 높은'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을 변형하는 것이다." (p.140)

결국 그의 작업은 "기독교 이념에 근거하는 윤리적 주체를 재정립"(p.289) 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행 기독교'의 체제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책의 끝머리에서 그는 기독교의 핵심에는 대타자-'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에 대한 부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신실한 기독교인을 고민케 하는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을 구제하는 것은 제도적 조직의 껍데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종교적 형식을 버리거나 형식을 유지하며 본질을 잃거나 둘 중 하나다. 기독교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영웅적 행위가 이것이다. 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 (p.277)

글솜씨가 없어 이 글만 보면 이게 뭔소리야 엉터리 비약 논리로 보이지만, 직접 읽어 보면 기독교의 교의에 대한 훨씬 풍부한 사유의 지점, 새기면서 읽을 구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그 전개되는 속도와 범위를 따라갈 수 있냐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나도 읽다 체했다. 체한 흔적은 이곳에). 기독교 신자는 물론, '탈근대'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위안의 철학

Posted 2008. 1. 25. 23:30 by surfysea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 - 몽테뉴 (p.5)


처음 맞이한 대학 생활에 대한 흥분과 실망이 뒤섞여,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대학 1학년 어느 날. 나는 한 일간지 인터넷 담당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이른바 알바생 '막내'이다보니 저녁에 신문 초판이 나오면 신문 뭉치를 1층에 내려가서 가져와야 했다. 이 신문을 사무실의 각 직원들에게 배분하는 것 까지 마치고 이제 본연의 업무로 돌아오면, 웹에 신문기사와 이미지를 포스팅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종이신문의 이미지와 대조하여 확인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날따라 북섹션이 눈에 들어왔다.

"와, 이거 재미있겠는데?"

그날 일이 끝나자마자 근처 서점에 들러 구입한 책이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이다. 새 책을 소중하게 안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 나는 정신없이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나는 어느새 이 젊은 철학자의 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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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1969년생.


어느새 나는 군대에 다녀오고, 정신없는 복학생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전공서적을 사려고 인터넷서점에서 이것저것 보던 중,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알랭 드 보통, 정명진 역, 생각의나무, 2005)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말이다.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전공서적과 같이 주문했으나, 학업의 압박(정확하게 말하면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 때문에 책은 한참을 책꽂이에만 꽂혀 있다가 이제야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사실은 대학 졸업반임에도 일이 뭔가 계획대로 풀려나가지 않는 나의 현실에, 알랭 드 보통이 나에게 어떤 암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는 것이 맞겠다. 마치 대학 1학년 때의 어떤 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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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인터넷교보문고


surfysea의 두 번째 포스팅 100(철학)편에서 소개하는 이 책은 예전에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이건 개정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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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리패키징 앨범을 자주 내서
초기에 앨범을 구입한 팬들을
슬프게 하는 가수도 있다.


이 책은 서양 철학 전반을 훑고 있는 것은 아니고, 저자가 '위안의 철학'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몇 명의 철학자를 소개하며 에세이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1. 소크라테스: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
  2. 에피쿠로스: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
  3. 세네카: 좌절에 대한 위안
  4. 몽테뉴: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
  5. 쇼펜하우어: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6. 니체: 곤경에 대한 위안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기억에 남았던 것은 "좌절을 설명하는 세네카의 사전" 중 "불공평" 부분이다. 드 보통은 세네카(우리가 윤리시간에 배웠던 스토아학파의 일원이다)의 저작 전편에서 한 가지 관념이 되풀이해서 나타남을 이야기한다. 우리 인간은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한데다 또 납득할 수 있는 좌절에 봉착한 경우에는 잘 참아 넘기는 반면, 예상하지 못한 좌절을 겪으면 엄청난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철학의 임무가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라 말한다.

...... 어떤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을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재앙으로 고통 받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며 그 사건을 정의의 도식으로 풀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부조리하게 비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두 가지 생각 사이를 왔다갔다하게 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결국엔 나쁜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 곳에 자리잡는 한편, 자신은 진정으로 말하건대 악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정의의 집행이 부른 대실패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기분을 느낀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정의롭다는 줄기찬 믿음은 이 세상에는 불공평이 있어왔다는 바로 그 불만 속에 암시되어 있다. (p.148)


저자는 인용 부분과 같은 세네카의 도식을 "운명의 여신은 허리케인과 같은 도덕적 무분별함으로 해(害)를 입힌다"라고 한마디로 정리하는 센스를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누구든 적어도 한 두 꼭지 이상에서 깊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학문이 고도로 전문화된 근대에, 철학은 여러 분과학문들을 탄생시켰지만 막상 자신의 역할은 한없이 축소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대학 초년생 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철학을 공부해보겠다고 설치던 때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책 만큼 철학이라는 것이 나에게 이렇게 위안을 주고 피부에 와 닿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전에 얼마간 이론적인 공부(그래봐야 초보적인 수준이지만)를 했던 것이 이러한 논의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결국 철학이라는 것은 현실의 삶과 맞닿아있어야 그 본래의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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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 뉴시스


문득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진부한 속담이 새삼 떠올랐다. 어떤 것에 대해서 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일수록 배운 것을 써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의심(소크라테스적으로 "자신아 무지한 상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두려움으로 인해 쉽게 자기의 주장을 할 수 없게 된다고들 한다. 그러니 나 같은 얼치기일수록, 자기주장만 강해지고 고집만 세지는 것이다. 이는 일면의 이론으로 사람을 재단하려 해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경계짓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는(사실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절대자'가 된 양 행동한다.

이런 사람들이 치닫는 극단적인 결말은 "연애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왜냐면 연애와 같은 관계에서 '교조적인 정치적 올바름'이 항상 정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가치의 발현은 이론의 틀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관계 속에 깊이 관여하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주장만 하는 것은, 원치 않는 훈수로만 들릴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