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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신을 위하여

Posted 2008. 3. 12. 01:07 by 알 수 없는 사용자
Die puppe und der Zwerg. Das Christentum zwischen perversion und Subversion

슬라보이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김정아 역, (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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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속한 곳으로 가려는 인간의 단순한 노력이 비단 종교적이 아니라 철학적일 수 있는 이유

- 우리는 "신을 믿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종교란 뭔가 텅빈 실체요, 무의미한 과잉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아 왔다. 뼈 속 깊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보이지 않는 실체에 기대거나 찬양을 일삼는 것이 쉽게 가능할리 없다. 그 궁극적인 긍정을 보기 이전에, 무엇보다 몰라서이거나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무식함을 전제하는 이런 거부의 자세가 뭔가 편협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를 유발하는 것 또한 종교가 가진 본래의 속성일 수 있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선택의 범주에서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다.
모든 논의는 거기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 외적으로 과잉되게 다가오는 기독교 역시 종교로서 무언의 필요에 의해 존재해왔으리라는 인정, 그 속에서 기독교의 구조를 살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해두자.  

 유물론자의 신학비판이라는 대강의 얼개로 짜여진 이 책은 무엇보다 그 숨겨진 구조를 다루고 있다. 명백한 구조에 대한 또 다른 구조와 구조들. 구조로 만들어진 서사와 서사 구조가 기획하는 인간의 구조들. 그 속에서 논리의 전개는 어떤 관념에서 시작해 또 다른 관념으로 끝없이 진행되고 환원된다. 지젝이 기독교를 분석하는 작업은 예상대로 전혀 신비롭지도 경건하지도 않다. 어느 모로든 기독교는 인간의 보존을 위한 종교[종교든 종교철학이든 종교이데올로기든]이며, 보다 영악하고 역사적이고 좀더 "이성적인"으로 선택된 체계였다는 유물론적 예상에 그대로 머문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다루는 온당한 방법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종교에 있어서 나의 무지를 조금 더 돌아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필요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요를 가정하게 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필요라는 것에 대한 좀더 넓은 이해"를 해보는 식으로 말이다.


1. 질문

 기독교에 대해 아주 "일상적"으로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독교의 잡초같고 거목같은 존재감이다. 우리는 분명 어느정도 명확한 근대 이후를 살아가고 있고, 지성과 이성의 무의식적 추종자들임에도 분명한데, 기독교는 왜 아직도 그대로 인가.
왜 과대한 것인가.
왜 아직도 과대해서 아예 평범해 버렸는가.
이를테면 "왜 (서양)사람들은 철학자건 정치가건 날건달이건 아무렇지 않게 교회에 가는 걸까" 요런 질문.

 이는 너무나 자주 비웃곤 하는 한국식 기독쟁이의 과격파 이미지와 전혀 다른 것이어서, 과도한 열의나 굴종이나 무식한 처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는 아편이니, 하는 과격한 주장과도 전혀 다르다. 차라리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에 가는 걸까 하는, 약간 바보 같고 무성의한 궁금함일 수는 있다. 이 책이 서두에서 던지는 오늘날의 종교 또한 그런 것이다. 아무도 종교를 자신의 철저한 인생의 등불로 삼지 않지만 아무도 신의 존재에 대해 따지고 들지 않는 다는 것. 기독교는 종교인가 체제인가, 종교적이라면 어떤 면에서 종교적인가, 그럼 특수한 종교성이란 또 뭔가?
 
 기독교가 의아스러워 보이는 것은 역시 스스로 너무나 엄연한 잔존체여서 일지도 모른다. 깊숙히 들어와 나가지 않고, 주변으로 팔 다리를 뻗친다. 이런 정신문화가 어쩌면 그렇게도 버젓이 공공연하게 권해지고 지탄받을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았고, 기독교를 믿는 집단이 공공연히 살아남았을 것이지만 난 종교라는 매커니즘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그래서 살아남은 그 이야기의 구조, 유인의 구조라는 한정적인 관점이 내게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지젝의 경우 이를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라는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 꼬릿말을 "죽은 신, 절대와 주체 사이의 균열, 단절, 메시아적 시간의 진행성, 죄와 벌의 상보성과 유보성" 등으로 달 수 있을 것 같다.


2. 신의 죽음

 이를테면,

"기독교는 결코 내세와 현세를 단절하지 않는다. 고로 주체가 살아가는 삶에서 가치와 쾌락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역시 신이 아닌 인간에게 있다..." 라는 명제를 하나 들어보자.

 흔히 이야기하는대로 그리스도는 '죽은 신'이다. 이는 절대자인 신이 스스로 유한성을 포기했다는, 그 자체로 인간이 되길 원했다는 뜻이다. 다만 이런 죽음은 신의 욕망 때문이기 보다, 인간이 신을 욕망하게 만들기 위한 도착적인 알레고리다, 라고 지젝은 말했다.
 욕망하게 만들었다, 라는데 도착성이 숨어 있는 것이고, 그 욕망의 내적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내놓는 것은 이를테면 기독교의 '구원'이다.

 그런 면에서 '구원'은 기독교적 도착성의 자명한 증거이자 일련의 서사적 기획이다. 아담의 죄가 선악과를 통해 인간에게 전가되고[원죄], 이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사해진다, 라는 죄와 용서의 이야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죄론이 믿을만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역시 이 구원 이야기가 구색이 맞는다는 것이다.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내적 구도에서 그 종교가 지정하고 있는 명백한 욕망이 있다는 것. 그것은 신의 것이기도 하고, 인간의 것이기도 하다. 인간과 신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손을 잡은 형국이니, 인간은 신을 믿을 수 있고 신은 인간이 신을 믿을 수 있는 체계인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곧 아담이다. 신의 아들이지만 인간이 되었던 존재다. 아담이 죄를 짓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그리스도는 죄를 짓지 않고 죽어 속죄하기 위해 태어났다. 죽음까지 내몰려서 최후의 순간 믿음이 흔들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 없는데, 이를 확인할 때까지 신은 그 유명한 수난passion의 길을 묵과한다. 여기서까지 신은 이를테면 기획자의 위치에 서있다는 것이다.
1)죄를 지어 생겨난 인간성과 2)인간으로 태어난 신이 인간으로 죽었다는 종교적 이야기.
 
  원죄를 갚기 위해 또 다른 아담(신의 아들)의 죽음이 필요했고, 죽을 수 있는 신이기 위해 그는 인간이어야 했다. 신과 인간의 경계가 뒤섞이지 않으면 인간은 죄사함도, 그러므로 신에 대한 경배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후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죽었고, 인간으로서 믿음을 지켰으며, 심지어는 한 번 믿음을 버린 적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지젝은 이 구원의 레파토리의 핵심이 신성이 아니라, 육체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인간의 욕망이 지시하는 것이 대충 다음과 같다고 해보자.

'불신은 죄악인 동시에 죄악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나 믿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한, 우리는 죄인이면서 죄인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난 죄인이지만 언제나 죄를 씼을 수 있는 길은 너무나 너그럽게 열려있다. 모든 것은 나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므로.'  
 
 종교적 구원의 욕망이 언제고 달성될 수 있다는 것, 불신이란 인간적 속성이며 기독교의 신 또한 인간의 속성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 때 예수는 신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이 무한한 안도감을 안겨준다. 지젝이 라캉과 프로이트를 끌어들이는 것도 대략 이 지점이다.
 이는 즉, "근본적으로 욕망의 끝을 설정함으로써 쾌락을 개방하는 것이고, 쾌락의 끝없고 무정형한 추구를 위해서 욕망 자체를 변질(욕망의 속성에 따르면 욕망은 충족된 직후 사라지는 것이므로)시키는 행위"다. 기독교는 무엇을 욕망하라고 지정해주지 않은 채 단지 그 욕망의 끝을 보인다.  
 그러므로 저자가 정의한 기독교는 구원을 바탕으로 하는 기복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그 구원의 강제가 현세에서 관철되지 않고 적절히 유보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주체성과 쾌락의 자유에 명시적 제약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모든 결론을 보다 이해하기 편하게 만들어기위해 저자가 내놓는 근거는 기독교만이 가진 "거리감"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인간과 신은 결코 서로 만나는 법이 없는, "단절"의 상황에 있다. 종교라는 이름을 신비주의적으로 바라보거나 체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신은 항상 저만치 멀리 서 있고 그 사이에는 그리스도가 서 있다.(혹은 내 안에 계신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신과 자기자신사이의 안정된 거리를 느낀다. 이를 두고 지젝은 "존재론적 균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불러온 것은 절대자로서 관여하지 않는 신(이를 위해 무능한 신을 형상화하는 것이 지젝의 중요한 논거일듯 하다)과 인간이 되어 죽은 신이 만들어낸 균열이다. 그 균열은 인간의 세계에서 합치되지도 단절되지도 않은채 그 상태로 안정되어 있다. 지젝의 수사에 충실해서 보자면, 주체에게서 대자가 사라지는 상황이며, 대자와의 균열 속에 주체만이 남은 상황?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균열 그 자체가 주체와 부정형의 쌍을 이루는 대자다. 이 균열은 (그 자체로 균열에 의해 지속되는)욕망에 근거한 기독교의 모든 인간적 속성의 기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서사적 기획이라면, 그 기획이 노리는 지점이 욕망이라는 지극히 인간 보편적인 속성이라면, 하고픈 말은 단순하다. 기독교가 그 무엇보다 삶을 예찬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기독교가 유인하는 "진리-영원성"에 대한 안도감은 천국-지옥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죽음을 신적인 세계로 못박음으로서 기독교의 신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삶에 100퍼센트의 의미를 준다. 인간과 신이 영원한 균열로 갈라져 있을 때 신은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너무나 인간적인 삶만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성경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삶의 계율도 구체적으로 지정하지 않는다. 구체를 지정하지 않는 진리, "신이 존재하며 신은 거기에 계신다."는 단순한 믿음.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균열 자체를 믿는 것이며, 이로써 그들은 신과 자신의 거리를 확인한다. 즉, 자신이 여전히 인간이라는 것에서 즉각적인 안도감을 느낀다.


3. 인간에게 필요한 것

 결국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적인 구원에 있어, 이는 단지 죽음 이후를 위한 대비책이 아니며, 살아 가고 있는 현재적 삶을 위함이다. 그것도 이미 과거에 일어난, 현재완료의 개념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를 기독교의 "메시아적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텐데, 메시아가 재림한 시점, 그것이 예수의 등장일 때 기독교의 메시아적 시간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가령 유대교가 언제까지나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한, 유대인들은 끝없이 자민족의 구원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며, 그로써 신과 합일하기 위해 현실세계와 끝없이 절연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미 일어난 구원을 믿음으로써, 그 구원 속에 전 인류를, 전 세계를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는 여건을 만든다.

"우리는 사건의 이후를 살고 있다. 모든 것- '거사'(Big Thing)-은 이미 일어났다. 여기에는 물론 역설이 있다. 즉 사건의 결과는, 격세유전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를 향한 극단적 충동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제는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은 꾀하고, 신은 이룬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끝없이 행동하고 개입하지만, 결과를 정하는 것은 신의 행동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공식은 반대다. '신은 꾀하고, 인간은 이룬다'가 아니라 순서가 바뀌는 것이다. 즉 '신이 먼저 이루고, 이어 인간이 꾀한다.' 요컨데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이라는 수동적 자세에 구속된 것인 반면 강림은 행위를 추동하는 암호로 기능한다."   (220.p)   

  기독교에서 믿음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특징이고, 나아가 절대자에 순응한다기보다도 순응 그 자체를 믿음으로서 스스로의 자유를 얻어내는 구조가 기독교라는 것이 이 책의 통찰일 것이다. 주체의 구속 없이 절대자를 내주는 기독교는 그렇게 주체들을 유인한다. 신념의 체계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신념이 세계를 향해 공고히 메여 있다는 점에서 이는 마치 불특정한 이데올로기 체계와 흡사하기도 하다.

 이데올로기가 좋은 것은 인간을 반실존주의적으로, 즉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만약 실존주의자의 불안이 신념 없음, 기대 없음, 희망 없음이라는 무정형에서 나온다 해보자. 그에 비해 특정한 이데올로기는 신념의 특정한 체계를 제공함으로써, 특정한 삶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특정한 개입을 이야기한다. 물론 지젝은 기독교의 이데올로기화가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기독교-이데올로기의 근본적 차이는 '특정한'이라는 지시어다.

-만약 기독교적 신념이 특정한 양식 자체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 신념이 어떠한 삶의 구체적인 선택을 지명하지 않는다면?
-앞서 살펴본 것 그대로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긍정과 적극적이고도 유보적인 개입만을 유지시키려 한다면?
-단지 삶 자체의 의미를 무조건적으로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때의 본질적 기독교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막무가내로 삶을 확신하는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존재를 인생에 단단히 부착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이는 차라리 간명한 철학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지젝이 이야기하는 불교의 선과 기독교의 궁극적인 차이도 이것이 아니었던가. 기독교적 인간은 현세에서 아무것도 초월하거나 합일하거나 통일하지 않으므로 삶 자체를 무의미에 던지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


4. 행복

 이제 애초의 질문으로 다시 넘어올 수 있다. 이성적 인간에게 기독교가 어필하는 이유. 가장 단순하게 혹시 그 원인이 삶의 "행복"인 것은 아닐까. 무조건적 행복이라는, 주체를 배재하는 모든 불안스러운 것들을 무의미로 환원시키는 아주 원초적인 장치. 이를테면 사랑과 같은. 자비와 같은.
 물론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 때의 신념 자체가, 상시적인 행복 자체가 정말로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만약 나쁘지는 않다고 해보자. 그럼 행복만으로 우리는 신을 믿을 만한 가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신을 믿는다는 것, 그로써 삶을 살아보겠다고 말하는 것은 과연 어떤 면에서 사르트르적 불필요와 나태의 허위성을 벗을 수 있는가.
 
(여기서의 문제는 다시 실존주의에 의해 제기될 것이다. 신을 가정하지 않는 우리의 존재가 언제나 너무나 나약하다는 것이고, 세계는 언제든지 인간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그러한 의미에서 또 다른 차원의 균열로 보이기도 한다. 지젝의 개념에서 인간과 신이 인신이라는 균열로 구획되어 있는 것 처럼, 인간의 개별적인 원칙과 세계의 현실원칙의 균열 사이에 있는 것이 종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의지가 배반당하고, 삶의 쾌락이 불쾌로 바뀔 수 밖에 없는 현실적 근거를 무시하거나[기독교] 무심할 수 있는 것[불교]. 지젝이 본질적 기독교의 소실점을 사도 바울에서 찾아내는 것 역시 사도 바울의 " 법과 사랑에 대한 유보적 거리"를 끌어오기 위해서다.)

 우리가 그 균열을 대처하기 위해 신을 끌어올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신을 믿을 수 없다면, 종교를 거부할 수 밖에 없다면 어쩌나? 종교가 미망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쨌든 그 모든 내적 사유의 양식이 절대자, 신성(비이성)에 기원해 있기 때문이다. 의존증임을 망각할 때 인간은 자신이 받을 대가를 주체 밖으로 떠 넘기려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아무리 주체의 외부, 삶 자체를 응시한다고 해도, 비이성에 대한 의심 속에 신을 믿으라는 것은 잔인한 독설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다시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이 종교적 구원을 거부한 것은 구원의 행위 자체에 대한 반감이라기 보다, 구원의 필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적 구원의 힘이 가장 약해지고 바래지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이 아닐까 하는 단순한 결론을 떠올릴 수도 있다.
 결국 죽음을 가정하지 않는 현세에서 실존주의자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절실한 차이는 도덕성 혹은 내면적 주체성, 반항적 자율성 등이 아닐지도 모른다. 죽어서 누가 천국을 가고 지옥을 가는 문제 역시 아니다. 그보다는 누가 더 세상에서 오래, 끈질기게, 어떤 상황에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삶에 대한 자연스런 애착은 어디서 오는가. 그 비루함은 어디서 오는가. 명확하게 말하기 힘들다. 그러한 면에서 오히려 실존주의 혹은 이성주의는 삶을 말하기 전에 실존을 주장하는 잔인한 선택지는 아닌가, 라고 물을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어떤 이들은 이들이 오히려 인간에 대한 과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지 않을까. 우리는 과연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으로 생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언제나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죄와 벌의 문제에서, 공공성, 이타주의, 박애, 자연주의, 생명주의 등. 나 또는 타자의 생명이 그 어떤 가치 보다 자극적일 수 있음은 어쩔 수 없는 우리 인식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전형적 사고방식에 마주친다.)  

 비겁해보인대도 반드시 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세상과 불화해 죽음을 택해야 하는가? 우리는 다른 어떤 실존적 가치를 떠나 삶의 이음과 과정의 행복 자체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종교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그럴듯하게 살아가기 위해 삶이 그 자체로 괜찮다고 말할수는 없는가? 정신 분석학에서처럼 인간은 욕망을 변질시키고 대응물을 찾으면서까지 어떻게든 스스로의 비천한 쾌락을 삭히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가 말이다. 우리는 슬픔을 감내해야하기에 삶을 원하는 것일까, 삶을 버리는 것일까. 이를테면 다이 호우잉, 위화 같은 중국 휴머니즘 문학에서의 인간은 결코후자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5. 슬픔

  행복 자체를 긍정할 것인가에 대한 이 문제가 형상화된 장면을 오에 겐자부로의 <침묵의 외침>(1962)이라는 소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오에는 여기서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을 때, 신도 세상도 믿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너무나 강하게 믿어버리는 아이들은 언제나 죽음의 문턱에 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의 종결 방식의 서글픔에 대해서, 실존의 슬픔에 대해서, 유보적으로 우회하고 싶은 마음이 곧 외침소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침묵의 외침>을 읽고 들었던 비애감은 간단히 말해서 양식화된 실존의 죽음이었다. 실존적으로 불화하는 젊은이들이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은 오히려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지적으로 진지해서 양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세계와 손을 잡고, 때로는 세계를 배신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들은 미성년이고 무엇보다 소외되어있다는 점에서 고독, 지적 오만, 병리적 과민, 과잉, 육체적 피폐, 무엇보다 분노와 도피심리를 갖고 있다.

 혼혈아이자 남창인 타이거의 죽는 장면. 누구보다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와 금과 같은 가슴을 지닌 18살의 소년, 타이거의 죽음을 대하는 실존청년 오응남의 태도는 죽음과 삶의 애매한 균열에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유예를 결코 놓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도피하는 적극적이고 비현실적인 죽음만이 진실임을 즉각적으로 동경하는 것. 이는 어느 정도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미학적 태도이며, 허무를 삶으로 바꿔내려는 최선의 행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실존적 불화가 시작된 지점이 어떻게든 세계에 있으며(그런점에서 이들은 <이방인>의 주인공과는 정반대의, 소름끼치대로 차가운 것이 아닌, 소름끼치도록 뜨겁고 나약한 이들이다) 그 소외는 하나 같이 캐릭터에 투여되어 있다. 이들의 불행이 실존의 적극적 선택이 아닌 실존의 아주 소극적인 반항으로 보이는 것은 그 "소외" 때문이다. 이를테면 "청춘"의 병이 몸 속에 각인된 이들의 실존적 반항은 애초에 소외라는 불행의 점지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때 타이거의 죽음,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몸소 실천해서 일본 어느 환락가에서 호랑이처럼 총에 맞아 죽은, 말 그대로의 산화는 내게 그저 아름답지 않고 슬프기만 하다.

 그렇다면 이는 산화할 수 밖에 없는 실존주의자가 소외를 어디까지 인식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삶과 죽음의 간극에 빠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니라 불행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이 단지 갑갑한 현실이라서 오토바이를 타고 반항적으로 야밤을 내달리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또한 그들의 잘못이 아니니까. 불행에 대해 이토록 무력한 세계에 대해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종교라는 필요성이 구원이라는 예쁜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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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적 성찰이 인간적 성찰일 수 있음은 성찰의 주체가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오가는 기독교의 역사들 중에 어디 신의 성스러움이 붙어 있단 말인가. 신의 이름은 인간의 모습 위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 아닌가. 인종차별, 전쟁, 자본축적 등의 폭력적 극단에서 이를테면 마더 테레사의 희생과 봉사까지, 신의 흔적이란 모두 인간의 행위를 빌어 기록되었다. 적어도 신은 단 한번도 인간세계에 나타난 적이 없단 말이다.
 우리에게 전지전능하고 참견 많은 신이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아버지 같이 우리의 태생적 나약함과 이기심을 그 때 그 때 알려주는 신이라면 짜증은 나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적어도 기원 이후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고 하니, 우리는 신을 신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난한 수용의 과정을 거치고, 그 이후 마치 철학과 문학을 믿듯 종교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그런 지점에서 지젝의 논의는 많은 의미를 준다. 이를테면 원죄의 공정성이라거나, 교회의 권력성 따위는 다루고 있지 않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신이라는 절대자에 안기고 싶은 욕망이 있느냐를 인정하는가, 의 문제다. 여전히 유물론으로는 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고, 실존적으로 절대자를 갈구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최초의 질문은 여전히 거기 놓여 있다. "너는 신을 믿고 싶은가?"라는 원초적이고 깜깜한 내면의 그곳이다. 성찰의 수많은 방식 중에 기독교라는 거대한 방식이 있다는 것, 이것이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휴머니즘이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는 이도 한 둘쯤 바라게 되는 것이다.



<Fin>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Posted 2008. 2. 20. 23:49 by 알 수 없는 사용자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방곤 역, (문예출판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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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가로서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휴머니즘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인간세상엔 수많은 가치들이 존재한다. 그 가치들을 내면화한 양식,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추상, 사회적 조건에 기대어 불거진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들이 구상화된 각종의 정치사상들 역시 제각각 존재한다. 정신의 범람 속에 인간이 조금이나마 우위에 두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절대적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실존이지 않은가? 실존, 즉 나 자신을 위해 살려면 나는 세상 속의 무엇이어야 하는가? 요런 질문들에 대한 간결한 대답이 이 책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실존주의 입문"이다.



1.

긴장.

 우리는 태어나면서 수많은 기성의 가치들을 본다. 그들이 다투는 꼬라지와 새로운 가치의 탄생과 그 가치의 소멸들을 본다. 가치를 위한 가치, 가치를 내면화한 논리들이 만든 제각각의 모랄들은 끝없이 우리를 긴장시키고 제약한다. 스스로 온전히 탈가치적일 수 있는(실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풍운아가 아닌 이상, 우리 개인은 스스로의 의식을 끝없이 가늠하고 결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는 나와 세상의 존재가 양립하는 존재의 조건이다. 결국 내면화하느냐, 혹은 의심하느냐에 따라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는 구체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향한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상식일 것이다.  
 
 이로써 세상사는 부단한 수정과 조절과 투쟁을 예고한다. 아주 사소한 예에서 매우 거대하고 실천적인 예에 이르기까지, 가치를 위시하는 충돌과 투쟁들은 그렇게 상대의 것을 탈취하고 정당화하는 논리를 내재하며, 그 정당성이 또 다시 만들어내는 모랄의 무게가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지향"에 대한 문제가 된다. 더구나 이는 개인의 일관성과 자존감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표면에 내세운 가치와 그 가치를 존중하는 이의 정신적 존엄을 위한 갈등이며, 그를 위한 희생을 위로 받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거창하게는 말이다.



2.

진리.

 그 모든 갈등이 형상화되기 위해 많은 조건과 이야기들이 존재하듯이, 역사 속에 이러한 조건들은 제각각의 진정성을 확보하곤 한다. 진리와 정의는 이러한 조건과 그 속의 진정성에서 다시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주의의 진정성은 그러한 시대의 지배조건과 정치적 움직임, 망딸리떼에서 비롯한다. 시대의 가치를 두고 벌이는 논리의 대결이 어떠한 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참여하는 인간의 희망 또한 제각각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진정으로 그 가치를 음미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그로 인한 성찰의 여유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로서 "신은 죽었다"의 명제를 지지했다. 이는 이 최소한의 자유 의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100퍼센트 지지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을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설득할 수 있는 의지.
이 때 개인이 지지해야할 가치는 스스로의 발견물이다. '절대자'가 '진리'라는 이름으로 줄 수 있는 선물도 아니고, 스스로의 탐구와 선택항의 축적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절대의 진리를 따르는 체계, 즉 신을 따르는 종교나 정치적 테제를 따르는 이데올로기가 모두 공격의 대상이다.
 이것은 진리를 믿고 선택한 인간의 의지, 즉 한 인간의 신념을 비하하기 위함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패배적 경멸을 실존주의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 신념을 영원한 것이라 말하는 신념의 체제를 공격할 뿐이다. 신념은 만들어지는 것이되 영원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신념이 다른 이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할 당위라는 것 또한 턱없는 일이다.

 좀 더 이야기 하면,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신념 또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유의미한 것은 개인의 자유에 의한 선택이지, 선택 이전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 선택은 영원하지 않은 대신 무한한 것이어서, 인간은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으로 인해 결코 일관될 필요도, 심지가 굳은 인간일 필요도 없다. 그것 또한 실존적 자유가 보장하는 가능성의 범주다.


"사람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원하는 그대로이다. 그리고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떄문에 사람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제 1 원칙이다. 이것이 또한 사람들이 주체성라고 부르는 것이다." (16.p)



3.

책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이 경박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무한한 자유와 선택에 그 자신만의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스스로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한 이후에나 그 실존을 논할 자격이 있다는 거다.
 가장 무난한 인간이라면 세상에 불화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구축하는 개인이다. 그가 아무리 자유롭게 실존적인 선택들을 반복한다 해도, 세상은 그 결과에 대해 언제나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만약 스스로 완성된 어느 한 명의 잘난 이가 있어, 그가 세계를 배신하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른바 "실존적 고뇌"를 실천했다고 쳐보자. 때에 따라 이는 공동의 합의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악일 수도 있다. 세계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에 앞서 이 자에게 그 세계는 견딜 수 없는 부조리의 장이다. 부조리는 고통스럽고,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슬프고도 무의미한 현실이다. 실존주의가 너무도 쉽사리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무의미를 견딜 수 없는 철학적 본질이 바로 실존주의 그 자체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한 부조리란 단지 서로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단순히 "유리됨" 혹은 "방종"이 아니다. 단지 방종을 가늠하는 기준이 그 자신의 외부에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떳떳함이다. 떳떳함은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을만큼의 의식적 자유가 내게 존재 했었던가"의 문제다. 즉, 한 인간의 내면에서 하나의 체계를 이룬 (비이성적인 일탈행위나 파괴적 미학 따위가 아닌)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감정과 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가치판단]이 자립할 수 있는 모든 여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역시 개인의 가치와 불화하는 세상을 철저히 주체적으로 응징하려드는 시도다. 사르트르 식이라면 '존재'는 세계에 속하되 그 개인의 '본질'은 세계라는 이해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1)먼저 그 불화의 내용은 개인의 나태함이나 인격적 불완전함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부적응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2)나아가 세상은 그를 단죄함으로써 그의 실존을 배제할 수 있었지만, 그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실존이란 죽음으로 종결될 때까지 꿋꿋하고 자신에 차있었다는 것이다.
 이 전제들로 인해 까뮈는 개인의 실존이 그 자신의 내면에서 완전할 수 있으며, 그가 세상에 지었다는 죄 역시 그 자신에게는 죄가 아닐 수 있음을 주장한다. 세계는 그를 죽이길 원하지만, 그 자신의 죽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자신뿐이다. 세계가 잘못된 것도 까뮈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단지 서로의 부조리가 충돌할 따름이다.



4.

불안.

 그렇기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매우 실존적인 불안이다. 방황하는 인간, 앞을 보지 못하며 현재에 휘둘리는 인간.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인간.
사르트르는 이 때 그 어떤 자조하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불안은 거의 축복이니 즐기는 것이 온당하지 않은가 라고, 오히려 그러한 불안이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나태함[구원에 대한 기대]를 고발하라고. 실존적인 '불안'은 '불성의'를 이겨내는 인간 자유의 표상이며, 그로써 만들어가는 세상은 어떠한 모델도 없는 한 인간 고유의 우주다.

 세상은 이러한 실존적 자유의 집합이어야 하기에,(이것만이 거의 유일한 가치적 당위의 주장일텐데) 제 우주가 존재하는 만큼, 타인의 우주와 공존해야함을 우리는 스스로 깨닫는다.
무엇보다 이 실존적 우주는 그 개개인이 살아가면서 겪은 선택들이 모두 모여 만들어진다는 전제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우월감을 갖지 않으며, 그 모양에 있어 어떠한 모범항도 바라지 않는다. 단지 세계와 맞닿아 있는 그 통로에서 서로 주고받는 손익을 따져 책임소재를 합의해 나가는 것이다. 이 구상은 공동체일 수 있다.  
 
 여기서 실존주의는 '주체성'에 대해 일종의 철학적 당위와 아울러 커다란 가능성을 말한다. 이 당위는 개인이 곧 어떠한 가치에 순응하고, 그로써 타인 혹은 공동체의 가치에 관계를 맺는 '앙가주망angagement'에 의해 거침없이 사회적으로 범람한다. 한 인간이 세계에 대해 앙가제 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는 기존의 사상적 가치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거나,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우주와 타인의 우주가 실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든 앙가주망의 끈을 인식하는 것, 존중하는 것, 거기에서 휴머니즘이 비롯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상황이나 이유에서건 인간으로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너그럽고, 초이해적인 관점을 선사 한다.



5.

진보의 허상.

 만약 보편적 진리가 허상이라면, 정답이 없는 만큼 불안하지만 오답에서는 자유롭다. 여기서 도출되는 지침 하나는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의심이다. 진보를 외치는 모든 움직임은 언제나 그 "절대적인 가치"를 통해 사람들을 유인하기 때문이다. 대신 실존주의자는 "개선"을 주장 한다. 이것은 타당하다. 이는 모든 투쟁적 이데올로기가 근본적으로 전제해 마지 않아야할 인간에 대한 조건, 즉 휴머니즘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투쟁의 완고하고 완전한 승리가 결국 또 다른 가치와 인간형의 완전한 말살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경각심이자 끝없는 고민의 출발이다.
 
 다이 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누구나 다 변해 가지. 변하지 않고 있을 구는 없으니까. 저마다 '인간'의 소재에서부터 진정한 인간으로 변해 가는 거야. 다른 인생길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내고, 다른 인간이 또다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지. 어떤 길에나 인간이 있고 어떤 인간 뒤에도 길이 있어. 길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인간에게는 부침이 있어. 길은 서로 교차되고 인간은 서로 부딪히지. 그것이 인생이야." (222.p)


 물론 이 말을 한 호젠 후는 문화대혁명에서 크게 몸을 덴 사람이고, 계급투쟁의 광기를 어느 정도 열렬하지 못한 휴머니즘적 감성으로 부정하는 인물이다. 실존주의자로서 사르트르가 항상 논쟁을 벌였던 것이 상대가 사회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서 뭔가 묘한 대조이기도 한다. 결국 이는 절대적 가치의 틈에서 좀 더 미세한 가치들과 그에 따른 작은 선택들의 가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단순히 철저하지 못해서라거나, 유아적이라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말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 주의가 아닌 인간의 인생을 긍정하기 위해서, "더 나음을 향하는 가치는 여럿이어야 한다"는 관점을 호젠 후는 몇 십년의 방랑을 통해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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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존주의에 있어 어떤 선택이 기성의 것과 완전히 싱크로 할 수 없다면 반드시 불화한다. 나의 앙가주망이 세계와 불화하여 승리할 수 없다면 산화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란 근본적으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불안하고, 손해보고, 거기다 진지한데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의 실존이 어떠한 내제된 '인간성'이 아니며, 스스로의 행동과 순간순간 저지른 선택의 집합만이 그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거대한 낙관론임은 매우매우 부정하기 힘들다.
 최소한 그들은 공기 속에 뜬 희망이나, 남을 해하기 십상인 신념체계, 거기에 쌀여온 어느 정도의 미학들과 귀를 뚫고 잠입하는 세간의 수많은 이론의 독소들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이 때론 부르주아적이고 패배적이고 심지어는 폭력적일 때도, 이 책이 보이는 최소한의 낙관주의는 무엇보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악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원하고 있다.


"이것이 될까 저것이 될까를 선택하는 것,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악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항상 선한 것이며, 어떠한 것은 전체에 대해서 선하지 않고서 우리에 대해 선할 수는 없다." (18.p)


 내게도 너무 흔한, 의식적 기만과 일종의 나태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그 "일독의 가치"가 있다.      




<Fin>

대중의 미망과 광기

Posted 2008. 1. 24. 23:2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traordinary popular Delusions
 the Madness of Crowds

찰스 멕케이, [대중의 미망과 광기], 이윤섭 역, (창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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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제부턴가 읽기 편한 책을 잡지 않게 되었다. 무시무시할만치 공부편력이 있어 "그 따윈 읽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는 없고, 그만치 비실용적인(?) 독서를 소외시켜왔던 모양이다. 활자를 지겨워하고, 내 손으로 쓰고 읽는 것 조차 귀찮아지면서, 책 그 자체에 대해서 은밀하게 떠들었던 허세가 무너져 버린 것도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옛날에는 쉽게 아무 책으로든 갔던 손이었다. 이제 뭔가 우습고 자만스런 것이 되어 제 주인의 게으름을 감춘다. 뭐라 자처하고는 싶으니 읽는 것이고, 애초에 즐거워 해서 시집이며 소설을 들고 다녔지만, 소지품 쯤을 드는 습관으로 인이 박힌 책 "소지"가 사실 스스로 책 읽는 즐거움을 들어먹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잠깐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책.계.에 올리는 첫 번째 서평 주제로 이 책은 참 가볍다. 그러므로 꽤 흥미를 유발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착석해서 매우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뜰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한 어투를 유지하는 만큼, 문득 옛날에 보던 (싸고 다양한) 잡학서적들이 떠올랐다.




2.

일괄로 표지를 이루어 나오는 'XX 총서'들 처럼, 각각의 사례들을 간단한 요지로 묶어 놓은 이 책은 그 나름대로 "The classic"으로 소개된다.

"민중의 미혹된 모습은 매우 오래되고 널리 퍼진 것이므로, 모두 다루려면 두세 권이 아니라 50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이 책은 대중의 미망과 광기를 다룬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수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852년 판의 저자 머릿말>

실제로 이 책에서 글쓴이의 특별한 역사적 관점이나 분석의 의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볼 수 있다. 유럽 민족사에서 관찰한 "변덕스럽고 기묘한 모습"을 역사적 장르 안에서 다루려는 이 이의 계획은 솔직하다. 대개는 어이없음을 표현하는 직설적인 느낌표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느낌표는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위트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 전반적인 부정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이슈는 크고, 역사는 그 만큼 흥미있는 볼륨만을 드러낸다.  

17세기, 또는 18세기 서유럽을 중심으로 대중들의 투기심리를 다루는 "미시시피 계획"이나 "남해회사 거품사건", "튤립 투기 대소동" 챕터는 "주식투자자들을 위한 입문"의 요량으로 읽힐 것이라 권장되고 있기도 한데, 저자는 대중들의 요령부득한 우매함을 비꼬면서도, 실지로 그 대중심리 이면에 있는 맥락을 정밀히 추적하는 작업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사건과 대중은 항상 유리 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이해관계"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각은 가난, 무지, 방종이라는 도덕적 퇴락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본래의 가볍게 산보나가는 듯한 문맥을 끝까지 유지해나갈 수 있기도 하며, 더욱이 섣불리 미시사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풍속도에 있어 여러가지 사례를 가볍게(사료 따위 누락된들), 재밌게 늘어놓을 수 있는 미덕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사냥", "머리모양과 수염에 미치는 정치와 종교의 영향", "자연사를 위장한 독살", "유령의 집" 등으로 진행되는 챕터의 구성을 지나면서 이러한 저널리즘적 관점은 점점 더 명확해진다.  




3.

응! 단도직입적으로 저자의 탐구 대상이 되는 "대중"의 발견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밌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거기까지만 재미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책을 지탱하는 구체적인 지적 의도는 문장들의 평균 길이 만큼이나 명료하다. 한 단어라면 "근대의 구획"이라는 간결한 의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시대 이전의 집단으로서의 인간, 즉 적법한 사회의 공적 규칙에 묶이지 못하고, 나아가 그러한 범주화를 스스로 파악하는 데 이르지 못한 역사적 미발단계가 이 책의 주인공인 "Crowds대중"을 규정하고 있다.
일테면 마녀로 몰려 불에 타 죽은 노약자, 과부, 부랑아, 정신병자, 행려병자, 바람둥이, 성격파탄자 등등은 어리석은 시대에 잘못 태어나 희생된 것이다. 그 속에 일정한 사회적 함의가 있다 해도 이는 명백히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곧장 치환될 수 있는 범주에 머물 것이다. 이 책이 지목한 광기에는 이처럼 애초에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의식이 일괄적으로 미비한 역사적 상황이 단단히 전제 되어 있다.
결국 이 책에 있어 대중은 '근대-교양' 이라는 문화의 구획을 받지 못한 집단으로 그려진다. 자본주의의 유동적 구조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인간 존재에 대한 미신, 교권과 절대왕권, 봉권 질서가 혼재된 상황 등이 드러내는 밑바탕은 그야말로 "전근대"다. 대중의 역사에 있어 전근대- 근대 초엽에 일어났던 '광기'는 전적으로 역사적인 '미망'에서 기원하는 것이며, 이 미망과 광기의 간극을 보여줌으로서 책과 글쓴이는 그 소임을 마친다.

이는 일반적인 의미의 "대중"을 명명하는 역사적 단계에서 매우 초기적인 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그칠 뿐이므로 사실 엄밀하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실질적 행위자인 대중의 형성을 보고자 하는데는 별 도움이 못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단지 1850년도를 살고 있었던 글쓴이는 그 님의 세계에서 반성하고 또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을 이렇게 적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까.


"그러나 광신에서 비롯되었고 잘못이 많았으나, 십자군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봉건영주들은 우월한 문명과 접촉해서 좀더 각성하게 되었다. 민중들의 권리도 조금은 향상되었다. 유럽인들은 힘든 경험을 통해 미신에서 조금씩 벗어나 다가오는 종교개혁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광신을 통해 서구인들에게 문명의 발전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288.p>



<Fin>





-덧붙이기
 
<또 근대, 대중>

이 책이 쓰여진 19세기 말을 전후로 이른바 "근대성"이 모습을 갖춰갔음은 다들 아시는 바다. 그 이들이 가졌던 기대로서의 발전과 진보는 가감없이 "계몽"이라는 단어로 형상화 될 수 있다. 일직선상의 진보는 이성적 계몽에 의지하고 있었다. 대중의 역사를 비관함으로써 새로운 대중을 희망했다는 점에서 글쓴이는 당시 매우 흔했던 근대인이자 지성인의 대열에 당당히 들어서고 있다.
무지와 무질서에서 발현한 광신, 탐욕의 광기를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인 19세기적 계몽은 사실상 근대의 완전한 쌍둥이며 규율, 권력, 무한한 발전과도 근친이다. 현재 우리에게 문제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근대 - 근대성 또한 여기서 본질적으로 진보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계몽이라는 유물을 오늘날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짝 바꿨을 때, 이는 사실상 제각각의, 그러나 한 길의 척도를 따라 아직도 내 앞에 놓여있다.

공적인 도덕, 그것은 투명한 윤리의 세계다. 자유주의에 굳건히 기대면서도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공공의 약속을 실천할 수 있는 시스템. 그것은 구조이며, 범주이며 여전히 구식의 경계 안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종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내 자신의 정체성이며 지향이다.

대중. 군중이나 공중이라는 말과 다르게 사용되는 대중을 전제함.

바보똘추불한당의 복수대명사에 가까운 대중과 소비사회의 근접도가 판명될 수록 우리는 스스로 대중 속에 있지 않음을 부정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내가 [대중의 미망과 광기]라는 제목에서 홀현히 파시즘, 또는 권력과 억압 속의 불쌍한 '나'를 떠올린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파시즘 체제를 구분하는 명백한 기준이 대중의 동원이라는 결과 자체, 또는 그 구체적 내역에 있지 않고, 대중과 사회과 맺고 있는 발산과 수용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얼마전에 나는 배운 바 있었다. 이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는 소린데, 즉, 방법론을 떠올림이다.

이를테면 근본적으로 파시즘 체계가 사회의 공적 가치를 도덕의 영역으로, 이데올로기화하고 신격화하고, 심미화한다는 논의가 (신형기 외, [문학 속의 파시즘], 삼인, 2001) 전제하고 있는 사회의 규율가치는 도덕이다. 신 교수님이 도덕을 윤리와 조응시켜 분리하고, 우리가 얼음처럼 맑은 누군가들의 윤리적 주장에 전율함을 끝없이 체험하는 한, 내가 지지해야 할 그 윤리적 가치를 합의하기 위한 공공의 규율과 권력을 나는 찬성한다. 요런 문제.
 
근대의 공공성은 물론 규율 권력 속에 작동한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적법한 지류에 편입되려는 욕망이 21세기에 "근대성"을 찾게 만든다 했을 때, 그렇다면 적절한 선에서 공공의 권력을 구상하는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진보의 길인 이상 (포스트 모던을 명백히 비웃는 것만 같은) 우리는 근대적 규율의 지배를 끝없이 갱신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공공이라는 말이, 신화적인 "근대" 속에서 논리적 후광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결국 공공성의 알맹이는 "공공적 수단으로서의 공공성"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아주 좋게 말해보자.
"무지한 대중으로서의 혐의를 벗는 길은 계몽된 사회적 기준을 부여받는 것도, 사회적 권력에 유치됨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변화해야 마땅한 공공 개념의 유동성을 감시할 수 있는 대중 지성의 성장[계몽], 그것을 보조하는 구조적 자산에 달려 있음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의 합의와 대중의 움직임에 있어서 권력이라는 근본적으로 어두운 독점이 존재하고, 집단은 집단으로서 언제까지나 미망과 광기의 혐의에서 완전할 수 없다는 비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오에 겐자부로 식으로라면 정말 거대한 새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느낌.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탈 근대란 정말로 무엇이야.
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