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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신을 위하여

Posted 2008. 3. 12. 01:07 by 알 수 없는 사용자
Die puppe und der Zwerg. Das Christentum zwischen perversion und Subversion

슬라보이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김정아 역, (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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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속한 곳으로 가려는 인간의 단순한 노력이 비단 종교적이 아니라 철학적일 수 있는 이유

- 우리는 "신을 믿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종교란 뭔가 텅빈 실체요, 무의미한 과잉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아 왔다. 뼈 속 깊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보이지 않는 실체에 기대거나 찬양을 일삼는 것이 쉽게 가능할리 없다. 그 궁극적인 긍정을 보기 이전에, 무엇보다 몰라서이거나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무식함을 전제하는 이런 거부의 자세가 뭔가 편협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를 유발하는 것 또한 종교가 가진 본래의 속성일 수 있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선택의 범주에서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다.
모든 논의는 거기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 외적으로 과잉되게 다가오는 기독교 역시 종교로서 무언의 필요에 의해 존재해왔으리라는 인정, 그 속에서 기독교의 구조를 살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해두자.  

 유물론자의 신학비판이라는 대강의 얼개로 짜여진 이 책은 무엇보다 그 숨겨진 구조를 다루고 있다. 명백한 구조에 대한 또 다른 구조와 구조들. 구조로 만들어진 서사와 서사 구조가 기획하는 인간의 구조들. 그 속에서 논리의 전개는 어떤 관념에서 시작해 또 다른 관념으로 끝없이 진행되고 환원된다. 지젝이 기독교를 분석하는 작업은 예상대로 전혀 신비롭지도 경건하지도 않다. 어느 모로든 기독교는 인간의 보존을 위한 종교[종교든 종교철학이든 종교이데올로기든]이며, 보다 영악하고 역사적이고 좀더 "이성적인"으로 선택된 체계였다는 유물론적 예상에 그대로 머문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다루는 온당한 방법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종교에 있어서 나의 무지를 조금 더 돌아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필요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요를 가정하게 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필요라는 것에 대한 좀더 넓은 이해"를 해보는 식으로 말이다.


1. 질문

 기독교에 대해 아주 "일상적"으로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독교의 잡초같고 거목같은 존재감이다. 우리는 분명 어느정도 명확한 근대 이후를 살아가고 있고, 지성과 이성의 무의식적 추종자들임에도 분명한데, 기독교는 왜 아직도 그대로 인가.
왜 과대한 것인가.
왜 아직도 과대해서 아예 평범해 버렸는가.
이를테면 "왜 (서양)사람들은 철학자건 정치가건 날건달이건 아무렇지 않게 교회에 가는 걸까" 요런 질문.

 이는 너무나 자주 비웃곤 하는 한국식 기독쟁이의 과격파 이미지와 전혀 다른 것이어서, 과도한 열의나 굴종이나 무식한 처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는 아편이니, 하는 과격한 주장과도 전혀 다르다. 차라리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에 가는 걸까 하는, 약간 바보 같고 무성의한 궁금함일 수는 있다. 이 책이 서두에서 던지는 오늘날의 종교 또한 그런 것이다. 아무도 종교를 자신의 철저한 인생의 등불로 삼지 않지만 아무도 신의 존재에 대해 따지고 들지 않는 다는 것. 기독교는 종교인가 체제인가, 종교적이라면 어떤 면에서 종교적인가, 그럼 특수한 종교성이란 또 뭔가?
 
 기독교가 의아스러워 보이는 것은 역시 스스로 너무나 엄연한 잔존체여서 일지도 모른다. 깊숙히 들어와 나가지 않고, 주변으로 팔 다리를 뻗친다. 이런 정신문화가 어쩌면 그렇게도 버젓이 공공연하게 권해지고 지탄받을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았고, 기독교를 믿는 집단이 공공연히 살아남았을 것이지만 난 종교라는 매커니즘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그래서 살아남은 그 이야기의 구조, 유인의 구조라는 한정적인 관점이 내게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지젝의 경우 이를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라는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 꼬릿말을 "죽은 신, 절대와 주체 사이의 균열, 단절, 메시아적 시간의 진행성, 죄와 벌의 상보성과 유보성" 등으로 달 수 있을 것 같다.


2. 신의 죽음

 이를테면,

"기독교는 결코 내세와 현세를 단절하지 않는다. 고로 주체가 살아가는 삶에서 가치와 쾌락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역시 신이 아닌 인간에게 있다..." 라는 명제를 하나 들어보자.

 흔히 이야기하는대로 그리스도는 '죽은 신'이다. 이는 절대자인 신이 스스로 유한성을 포기했다는, 그 자체로 인간이 되길 원했다는 뜻이다. 다만 이런 죽음은 신의 욕망 때문이기 보다, 인간이 신을 욕망하게 만들기 위한 도착적인 알레고리다, 라고 지젝은 말했다.
 욕망하게 만들었다, 라는데 도착성이 숨어 있는 것이고, 그 욕망의 내적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내놓는 것은 이를테면 기독교의 '구원'이다.

 그런 면에서 '구원'은 기독교적 도착성의 자명한 증거이자 일련의 서사적 기획이다. 아담의 죄가 선악과를 통해 인간에게 전가되고[원죄], 이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사해진다, 라는 죄와 용서의 이야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죄론이 믿을만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역시 이 구원 이야기가 구색이 맞는다는 것이다.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내적 구도에서 그 종교가 지정하고 있는 명백한 욕망이 있다는 것. 그것은 신의 것이기도 하고, 인간의 것이기도 하다. 인간과 신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손을 잡은 형국이니, 인간은 신을 믿을 수 있고 신은 인간이 신을 믿을 수 있는 체계인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곧 아담이다. 신의 아들이지만 인간이 되었던 존재다. 아담이 죄를 짓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그리스도는 죄를 짓지 않고 죽어 속죄하기 위해 태어났다. 죽음까지 내몰려서 최후의 순간 믿음이 흔들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 없는데, 이를 확인할 때까지 신은 그 유명한 수난passion의 길을 묵과한다. 여기서까지 신은 이를테면 기획자의 위치에 서있다는 것이다.
1)죄를 지어 생겨난 인간성과 2)인간으로 태어난 신이 인간으로 죽었다는 종교적 이야기.
 
  원죄를 갚기 위해 또 다른 아담(신의 아들)의 죽음이 필요했고, 죽을 수 있는 신이기 위해 그는 인간이어야 했다. 신과 인간의 경계가 뒤섞이지 않으면 인간은 죄사함도, 그러므로 신에 대한 경배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후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죽었고, 인간으로서 믿음을 지켰으며, 심지어는 한 번 믿음을 버린 적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지젝은 이 구원의 레파토리의 핵심이 신성이 아니라, 육체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인간의 욕망이 지시하는 것이 대충 다음과 같다고 해보자.

'불신은 죄악인 동시에 죄악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나 믿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한, 우리는 죄인이면서 죄인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난 죄인이지만 언제나 죄를 씼을 수 있는 길은 너무나 너그럽게 열려있다. 모든 것은 나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므로.'  
 
 종교적 구원의 욕망이 언제고 달성될 수 있다는 것, 불신이란 인간적 속성이며 기독교의 신 또한 인간의 속성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 때 예수는 신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이 무한한 안도감을 안겨준다. 지젝이 라캉과 프로이트를 끌어들이는 것도 대략 이 지점이다.
 이는 즉, "근본적으로 욕망의 끝을 설정함으로써 쾌락을 개방하는 것이고, 쾌락의 끝없고 무정형한 추구를 위해서 욕망 자체를 변질(욕망의 속성에 따르면 욕망은 충족된 직후 사라지는 것이므로)시키는 행위"다. 기독교는 무엇을 욕망하라고 지정해주지 않은 채 단지 그 욕망의 끝을 보인다.  
 그러므로 저자가 정의한 기독교는 구원을 바탕으로 하는 기복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그 구원의 강제가 현세에서 관철되지 않고 적절히 유보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주체성과 쾌락의 자유에 명시적 제약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모든 결론을 보다 이해하기 편하게 만들어기위해 저자가 내놓는 근거는 기독교만이 가진 "거리감"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인간과 신은 결코 서로 만나는 법이 없는, "단절"의 상황에 있다. 종교라는 이름을 신비주의적으로 바라보거나 체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신은 항상 저만치 멀리 서 있고 그 사이에는 그리스도가 서 있다.(혹은 내 안에 계신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신과 자기자신사이의 안정된 거리를 느낀다. 이를 두고 지젝은 "존재론적 균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불러온 것은 절대자로서 관여하지 않는 신(이를 위해 무능한 신을 형상화하는 것이 지젝의 중요한 논거일듯 하다)과 인간이 되어 죽은 신이 만들어낸 균열이다. 그 균열은 인간의 세계에서 합치되지도 단절되지도 않은채 그 상태로 안정되어 있다. 지젝의 수사에 충실해서 보자면, 주체에게서 대자가 사라지는 상황이며, 대자와의 균열 속에 주체만이 남은 상황?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균열 그 자체가 주체와 부정형의 쌍을 이루는 대자다. 이 균열은 (그 자체로 균열에 의해 지속되는)욕망에 근거한 기독교의 모든 인간적 속성의 기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서사적 기획이라면, 그 기획이 노리는 지점이 욕망이라는 지극히 인간 보편적인 속성이라면, 하고픈 말은 단순하다. 기독교가 그 무엇보다 삶을 예찬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기독교가 유인하는 "진리-영원성"에 대한 안도감은 천국-지옥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죽음을 신적인 세계로 못박음으로서 기독교의 신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삶에 100퍼센트의 의미를 준다. 인간과 신이 영원한 균열로 갈라져 있을 때 신은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너무나 인간적인 삶만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성경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삶의 계율도 구체적으로 지정하지 않는다. 구체를 지정하지 않는 진리, "신이 존재하며 신은 거기에 계신다."는 단순한 믿음.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균열 자체를 믿는 것이며, 이로써 그들은 신과 자신의 거리를 확인한다. 즉, 자신이 여전히 인간이라는 것에서 즉각적인 안도감을 느낀다.


3. 인간에게 필요한 것

 결국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적인 구원에 있어, 이는 단지 죽음 이후를 위한 대비책이 아니며, 살아 가고 있는 현재적 삶을 위함이다. 그것도 이미 과거에 일어난, 현재완료의 개념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를 기독교의 "메시아적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텐데, 메시아가 재림한 시점, 그것이 예수의 등장일 때 기독교의 메시아적 시간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가령 유대교가 언제까지나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한, 유대인들은 끝없이 자민족의 구원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며, 그로써 신과 합일하기 위해 현실세계와 끝없이 절연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미 일어난 구원을 믿음으로써, 그 구원 속에 전 인류를, 전 세계를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는 여건을 만든다.

"우리는 사건의 이후를 살고 있다. 모든 것- '거사'(Big Thing)-은 이미 일어났다. 여기에는 물론 역설이 있다. 즉 사건의 결과는, 격세유전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를 향한 극단적 충동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제는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은 꾀하고, 신은 이룬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끝없이 행동하고 개입하지만, 결과를 정하는 것은 신의 행동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공식은 반대다. '신은 꾀하고, 인간은 이룬다'가 아니라 순서가 바뀌는 것이다. 즉 '신이 먼저 이루고, 이어 인간이 꾀한다.' 요컨데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이라는 수동적 자세에 구속된 것인 반면 강림은 행위를 추동하는 암호로 기능한다."   (220.p)   

  기독교에서 믿음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특징이고, 나아가 절대자에 순응한다기보다도 순응 그 자체를 믿음으로서 스스로의 자유를 얻어내는 구조가 기독교라는 것이 이 책의 통찰일 것이다. 주체의 구속 없이 절대자를 내주는 기독교는 그렇게 주체들을 유인한다. 신념의 체계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신념이 세계를 향해 공고히 메여 있다는 점에서 이는 마치 불특정한 이데올로기 체계와 흡사하기도 하다.

 이데올로기가 좋은 것은 인간을 반실존주의적으로, 즉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만약 실존주의자의 불안이 신념 없음, 기대 없음, 희망 없음이라는 무정형에서 나온다 해보자. 그에 비해 특정한 이데올로기는 신념의 특정한 체계를 제공함으로써, 특정한 삶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특정한 개입을 이야기한다. 물론 지젝은 기독교의 이데올로기화가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기독교-이데올로기의 근본적 차이는 '특정한'이라는 지시어다.

-만약 기독교적 신념이 특정한 양식 자체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 신념이 어떠한 삶의 구체적인 선택을 지명하지 않는다면?
-앞서 살펴본 것 그대로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긍정과 적극적이고도 유보적인 개입만을 유지시키려 한다면?
-단지 삶 자체의 의미를 무조건적으로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때의 본질적 기독교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막무가내로 삶을 확신하는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존재를 인생에 단단히 부착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이는 차라리 간명한 철학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지젝이 이야기하는 불교의 선과 기독교의 궁극적인 차이도 이것이 아니었던가. 기독교적 인간은 현세에서 아무것도 초월하거나 합일하거나 통일하지 않으므로 삶 자체를 무의미에 던지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


4. 행복

 이제 애초의 질문으로 다시 넘어올 수 있다. 이성적 인간에게 기독교가 어필하는 이유. 가장 단순하게 혹시 그 원인이 삶의 "행복"인 것은 아닐까. 무조건적 행복이라는, 주체를 배재하는 모든 불안스러운 것들을 무의미로 환원시키는 아주 원초적인 장치. 이를테면 사랑과 같은. 자비와 같은.
 물론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 때의 신념 자체가, 상시적인 행복 자체가 정말로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만약 나쁘지는 않다고 해보자. 그럼 행복만으로 우리는 신을 믿을 만한 가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신을 믿는다는 것, 그로써 삶을 살아보겠다고 말하는 것은 과연 어떤 면에서 사르트르적 불필요와 나태의 허위성을 벗을 수 있는가.
 
(여기서의 문제는 다시 실존주의에 의해 제기될 것이다. 신을 가정하지 않는 우리의 존재가 언제나 너무나 나약하다는 것이고, 세계는 언제든지 인간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그러한 의미에서 또 다른 차원의 균열로 보이기도 한다. 지젝의 개념에서 인간과 신이 인신이라는 균열로 구획되어 있는 것 처럼, 인간의 개별적인 원칙과 세계의 현실원칙의 균열 사이에 있는 것이 종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의지가 배반당하고, 삶의 쾌락이 불쾌로 바뀔 수 밖에 없는 현실적 근거를 무시하거나[기독교] 무심할 수 있는 것[불교]. 지젝이 본질적 기독교의 소실점을 사도 바울에서 찾아내는 것 역시 사도 바울의 " 법과 사랑에 대한 유보적 거리"를 끌어오기 위해서다.)

 우리가 그 균열을 대처하기 위해 신을 끌어올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신을 믿을 수 없다면, 종교를 거부할 수 밖에 없다면 어쩌나? 종교가 미망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쨌든 그 모든 내적 사유의 양식이 절대자, 신성(비이성)에 기원해 있기 때문이다. 의존증임을 망각할 때 인간은 자신이 받을 대가를 주체 밖으로 떠 넘기려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아무리 주체의 외부, 삶 자체를 응시한다고 해도, 비이성에 대한 의심 속에 신을 믿으라는 것은 잔인한 독설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다시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이 종교적 구원을 거부한 것은 구원의 행위 자체에 대한 반감이라기 보다, 구원의 필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적 구원의 힘이 가장 약해지고 바래지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이 아닐까 하는 단순한 결론을 떠올릴 수도 있다.
 결국 죽음을 가정하지 않는 현세에서 실존주의자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절실한 차이는 도덕성 혹은 내면적 주체성, 반항적 자율성 등이 아닐지도 모른다. 죽어서 누가 천국을 가고 지옥을 가는 문제 역시 아니다. 그보다는 누가 더 세상에서 오래, 끈질기게, 어떤 상황에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삶에 대한 자연스런 애착은 어디서 오는가. 그 비루함은 어디서 오는가. 명확하게 말하기 힘들다. 그러한 면에서 오히려 실존주의 혹은 이성주의는 삶을 말하기 전에 실존을 주장하는 잔인한 선택지는 아닌가, 라고 물을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어떤 이들은 이들이 오히려 인간에 대한 과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지 않을까. 우리는 과연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으로 생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언제나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죄와 벌의 문제에서, 공공성, 이타주의, 박애, 자연주의, 생명주의 등. 나 또는 타자의 생명이 그 어떤 가치 보다 자극적일 수 있음은 어쩔 수 없는 우리 인식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전형적 사고방식에 마주친다.)  

 비겁해보인대도 반드시 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세상과 불화해 죽음을 택해야 하는가? 우리는 다른 어떤 실존적 가치를 떠나 삶의 이음과 과정의 행복 자체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종교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그럴듯하게 살아가기 위해 삶이 그 자체로 괜찮다고 말할수는 없는가? 정신 분석학에서처럼 인간은 욕망을 변질시키고 대응물을 찾으면서까지 어떻게든 스스로의 비천한 쾌락을 삭히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가 말이다. 우리는 슬픔을 감내해야하기에 삶을 원하는 것일까, 삶을 버리는 것일까. 이를테면 다이 호우잉, 위화 같은 중국 휴머니즘 문학에서의 인간은 결코후자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5. 슬픔

  행복 자체를 긍정할 것인가에 대한 이 문제가 형상화된 장면을 오에 겐자부로의 <침묵의 외침>(1962)이라는 소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오에는 여기서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을 때, 신도 세상도 믿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너무나 강하게 믿어버리는 아이들은 언제나 죽음의 문턱에 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의 종결 방식의 서글픔에 대해서, 실존의 슬픔에 대해서, 유보적으로 우회하고 싶은 마음이 곧 외침소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침묵의 외침>을 읽고 들었던 비애감은 간단히 말해서 양식화된 실존의 죽음이었다. 실존적으로 불화하는 젊은이들이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은 오히려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지적으로 진지해서 양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세계와 손을 잡고, 때로는 세계를 배신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들은 미성년이고 무엇보다 소외되어있다는 점에서 고독, 지적 오만, 병리적 과민, 과잉, 육체적 피폐, 무엇보다 분노와 도피심리를 갖고 있다.

 혼혈아이자 남창인 타이거의 죽는 장면. 누구보다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와 금과 같은 가슴을 지닌 18살의 소년, 타이거의 죽음을 대하는 실존청년 오응남의 태도는 죽음과 삶의 애매한 균열에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유예를 결코 놓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도피하는 적극적이고 비현실적인 죽음만이 진실임을 즉각적으로 동경하는 것. 이는 어느 정도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미학적 태도이며, 허무를 삶으로 바꿔내려는 최선의 행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실존적 불화가 시작된 지점이 어떻게든 세계에 있으며(그런점에서 이들은 <이방인>의 주인공과는 정반대의, 소름끼치대로 차가운 것이 아닌, 소름끼치도록 뜨겁고 나약한 이들이다) 그 소외는 하나 같이 캐릭터에 투여되어 있다. 이들의 불행이 실존의 적극적 선택이 아닌 실존의 아주 소극적인 반항으로 보이는 것은 그 "소외" 때문이다. 이를테면 "청춘"의 병이 몸 속에 각인된 이들의 실존적 반항은 애초에 소외라는 불행의 점지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때 타이거의 죽음,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몸소 실천해서 일본 어느 환락가에서 호랑이처럼 총에 맞아 죽은, 말 그대로의 산화는 내게 그저 아름답지 않고 슬프기만 하다.

 그렇다면 이는 산화할 수 밖에 없는 실존주의자가 소외를 어디까지 인식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삶과 죽음의 간극에 빠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니라 불행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이 단지 갑갑한 현실이라서 오토바이를 타고 반항적으로 야밤을 내달리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또한 그들의 잘못이 아니니까. 불행에 대해 이토록 무력한 세계에 대해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종교라는 필요성이 구원이라는 예쁜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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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적 성찰이 인간적 성찰일 수 있음은 성찰의 주체가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오가는 기독교의 역사들 중에 어디 신의 성스러움이 붙어 있단 말인가. 신의 이름은 인간의 모습 위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 아닌가. 인종차별, 전쟁, 자본축적 등의 폭력적 극단에서 이를테면 마더 테레사의 희생과 봉사까지, 신의 흔적이란 모두 인간의 행위를 빌어 기록되었다. 적어도 신은 단 한번도 인간세계에 나타난 적이 없단 말이다.
 우리에게 전지전능하고 참견 많은 신이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아버지 같이 우리의 태생적 나약함과 이기심을 그 때 그 때 알려주는 신이라면 짜증은 나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적어도 기원 이후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고 하니, 우리는 신을 신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난한 수용의 과정을 거치고, 그 이후 마치 철학과 문학을 믿듯 종교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그런 지점에서 지젝의 논의는 많은 의미를 준다. 이를테면 원죄의 공정성이라거나, 교회의 권력성 따위는 다루고 있지 않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신이라는 절대자에 안기고 싶은 욕망이 있느냐를 인정하는가, 의 문제다. 여전히 유물론으로는 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고, 실존적으로 절대자를 갈구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최초의 질문은 여전히 거기 놓여 있다. "너는 신을 믿고 싶은가?"라는 원초적이고 깜깜한 내면의 그곳이다. 성찰의 수많은 방식 중에 기독교라는 거대한 방식이 있다는 것, 이것이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휴머니즘이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는 이도 한 둘쯤 바라게 되는 것이다.



<Fin>
 





탈근대의 신학은 어떤 모습이어얄까 - [죽은 신을 위하여]

Posted 2008. 3. 9. 23:4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죽은 신을 위하여(양장본) 상세보기
슬라보이 지젝 지음 | 길(박우정) 펴냄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신이 죽은 사회, 다시 말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유형의 대의를 부정하며 소소한 쾌락을 누리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사회는 오히려 삶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탈형이상학적 생존지상주의의 끝은 먹기 위해 사는 삶, 죽음과 다름없는 삶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원제인 '


바야흐로 포스트-모던이다. 근대의 오만에 대한 성찰적 어쩌고 전지구적 시민사회의 구축이 저쩌고... 이제 우리는 근대적 합리성에 탈근대적 성찰성까지 갖추었으니 정말로 역사는 완결된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역사는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지구화에 수반되는 노동력의 자유로운 (노동자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는) 이동과 함께 노동계급 내에서의 인종차별과 증오가 확산되고 있다. '모던'의 한 축이었던 사회주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더더욱 심하다. 박노자가 지적하듯 "보통" 국민 국가로 돌아간 러시아에서는 비러시아인에 대한 끔찍한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헌팅턴 류의 문명충돌 얘기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슬람, 유대, 기독교에 공통되는 '근본주의'가 중동과 세계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주류' 개신교가 어떤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지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애저녁에 졸업했어야 할 민족, 종교 나부랑이가 다시 득세를 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왜 멋진 탈근대 세계가 야만으로 되돌아가는가?

혹은 이에 대처하는 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만들어진 신] 같은 계몽/소아병적 비판? 혹은 '개독까'의 예수천국 불신지옥 비난? (일단 "예수천국 불신지옥" 에 대한 고찰, 대한민국에 주류 기독교란 없다. 를 읽어보라) 아니면 그리스도의 희생을 잔인한 교의라고 공격하며 민중과 함께한 체 게바라 풍 혁명가 예수를 그려내기? 그도 아니면 '영성' - "모종의 근본적인 경험", "근본적인 타자성을 향해 스스로를 개방함으로써 뭔가 특별한 윤리적 태도를 획득하는 방식", "압도적인 향유의 형태를 경험하는 방식"(p.11) - 같은 고도로 세련된 자위행위?

지젝은 이런 질문에 대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뒤집어 "'신학'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한다"(p.5)고 잘라 말함으로써 '정면승부'를 시도한다. 역자가 지적하듯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의 혹은 이념은 이제 종교적 신념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이 유력한 이념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p.280)이며, 다시 말하면 "그러니까 믿어 안 믿어?" 라는 '저속한' 질문 (p.11)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젝의 주장은 명확하다. 기독교의 교의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 보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쪽)

주체로부터의 초월이란 교리를 통해 파시즘에 동원되거나 서양에서 취향으로서 소비되는 불교, '세속적' 쾌락을 보장해 주는 현행 기독교("너는 욕망에 마음껏 탐닉하며 삶을 즐겨도 좋다. 내가 이미 그 값을 치렀으니!" - p.83), "본연의 인간의 잔여"로서의 유대인·유대교를 차례로 비판하며, 지젝은 진정한 기독교 -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적 접근 - 적 경험만이 적절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타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의 핵심은 신 자체의 분열/균열이다. 타 종교에서 신과 영원의 세계는 인간과 분리되어 있으며 죽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내세로 그려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은 스스로 '타락'을 자초한다.

인간이 신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신이 인간을 신 자신에게서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 자체에 이러한 분리가 반영되어 신이 신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하는 것이다. (p.26)

전형적인 무신론에서 신은 더 이상 자기를 믿지 않는 인간들에 대해서 죽는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신은 신 자신에 대해서 죽는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도가 범할 수 있는 궁극의 죄를 범한다. 믿음(Faith)이 흔들리는 죄. (p.27)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 신이 바로 이 균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는 균열에 의해 인간과 분리된 피안의 신이 아니라, 균열 자체, 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다.
(p.42)

죄악을 저지른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희생양으로... 운운의 신학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어(타락하여) 신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 그리고 그 타락 속에 구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타락은 사실 전혀 타락이 아니라 '자체로' 타락의 정반대, 자유의 출현이다. 타락 이전의 순수 상태는 없다. 타락 이전은 그저 어리석은 자연적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과거의 '보다 높은'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을 변형하는 것이다." (p.140)

결국 그의 작업은 "기독교 이념에 근거하는 윤리적 주체를 재정립"(p.289) 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행 기독교'의 체제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책의 끝머리에서 그는 기독교의 핵심에는 대타자-'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에 대한 부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신실한 기독교인을 고민케 하는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을 구제하는 것은 제도적 조직의 껍데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종교적 형식을 버리거나 형식을 유지하며 본질을 잃거나 둘 중 하나다. 기독교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영웅적 행위가 이것이다. 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 (p.277)

글솜씨가 없어 이 글만 보면 이게 뭔소리야 엉터리 비약 논리로 보이지만, 직접 읽어 보면 기독교의 교의에 대한 훨씬 풍부한 사유의 지점, 새기면서 읽을 구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그 전개되는 속도와 범위를 따라갈 수 있냐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나도 읽다 체했다. 체한 흔적은 이곳에). 기독교 신자는 물론, '탈근대'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에게도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