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소비의 탄생, [백화점 - 도시문화의 근대]

Posted 2008. 3. 16. 20:3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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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탄에 있는 상하이 세관. 빅 벤을 흉내낸 시계탑에 유의


나도 너도 이런 곳에 태어날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일제 시대 초반 친일파 졸부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어디 유럽 쪽으로 유학이나 가서 사는게 꿈이라면 꿈이겠네.
일본에서 태어났더라면 다이쇼, 혹은 메이지시대에.
유럽 쪽이라면 로코코로 부탁해.
어느 때 어느 곳이든 돈은 많아야지.
그래야 아무 것도 생각 안 하고 상병신처럼 낭만과 꿈을 바랄 수 있을테니까.
클래식보다는 기묘한 레트로가,
바로크보다는 절도 없고 문란한 로코코가 좋아

by 시음, [워너비 모던걸까지는 아니더라도]

1. 얼마 전에 인천 차이나타운을 다녀왔다. 그러나 차이나타운보다는 근대건축물 거리에 더 눈이 갔던 것이 사실이다. 인천/제물포는 조선 최초의 개항장 중 하나였고 조계지이기도 했던 만큼 구한말과 식민지시기의 근대 건축물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게 매력이다. 한국인이라면 으레 '가져야 할'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과는 상관없이, 나는 이런 건물들이 그렇게 이쁠 수가 없다. 예전에 상하이를 갔을 때도, 가장 매혹되었던 곳은 다름아닌 와이탄이었다. 반식민지의 조계에 세워진 열강의 아름다운 남근들에 홀려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댔었던 것이다.

2. 근대에 대한 논의는 차고 넘친다. 사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등등의 논쟁, 박정희식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성찰적 논의, '포스트모던' 류의 지적 유희 등등. 그런데 식민지 자손의 이 뒤틀린 '근대적' 미감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걸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에 삽입된, 현기증나듯 아름다운 근대의 흔적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 경험과 함께 우리에게 이식된 근대를 극복하는 작업은 그 근대가 무엇을 구축해 왔는가를 적나라하게, 혹은 충분히 아름답게 드러내 보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조선에서의 개발은 수탈목적이었으니까 무익했다, 라는 결론을 성급히 내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 모국' 일본이 근대적 제도를 어떻게 구축해왔는가를 들여다보는 연구는 중요하다. [백화점]은 근대화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던 메이지 이래 일본의 백화점들이 어떻게 근대적 소비자를 생산했는가를 일본의 권공장-오복점-백화점들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보여 준다.

백화점(일본근대스펙트럼 1) 상세보기
하쓰다 토오루 지음 | 논형 펴냄
이 책은 권공장에서 백화점으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백화점과 상업공간의 근대 일본도시 속 발전과 변용을 밝힌다. 메이지 10년대부터 20년대에 걸쳐서 권공장의 탄생과 발전, 30년대 이후의 백화점 성립과 고객 전략의 전개, 나아가 다이쇼 말기 이후 터미널 디파트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백화점사를, 주요 대상으로 도쿄의 미쓰코시, 시라키야, 마쓰야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자세하게 정리하였다.

3. 백화점의 역사는 박람회에서 팔고 남은 물품을 진열판매하던 '권공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공장은 기존의 상점에서 통용되던 판매방식을 과감히 버린다. 이전에는 주인과 손님이 마주앉아서 손님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창고에서 가져다 보여 주는 식이었는데 비해, 권공장은 진열판매방식을 택해 손님이 걸어다니면서 물품명, 가격 등이 적혀 진열된 물건을 보고 쇼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외에도 입구부터 출구까지 관람인의 동선을 계획했다는 점, 이후 신발을 신은 채 입장이 가능했다는 점 등은 근대적 소비공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에이라쿠쵸의 타쓰노구치 권공장을 시작으로 메이지 35년(1902년)까지 도쿄 시내에만 27개의 권공장이 생길 정도로 그 인기는 선풍적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권공장을 다니는 행위' 자체를 즐기기 시작했다.
일부러 '쾌락원'을 만들어 사람을 모을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권공장을 찾아들었다.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는 권공장에 모여, 그 시끌벅적 흥청거리는 인파를 뚫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즐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p.62)

4.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05년, 미쓰이 오복점은 구미의 '디파트먼트 스토어'를 벤치마킹해서 미쓰코시 백화점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권공장은 메이지 말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여 갔고, 그 바톤을 백화점이 이어받게 된 것이다. 미쓰코시를 비롯한 백화점들은 서양식 부기방식과 진열판매방식, 쇼윈도를 도입하고, PR지를 발행하거나 옷감 도안 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유행을 창조함으로써 근대적 소비와 욕망의 구조를 확립한다.
사람들은 뭔가를 사기 위해서 백화점에 오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에 들어가면서부터 비로소 무엇인가 갖고 싶은 것을 찾아내게끔 되었던 것이다. ...... 근대사회 속에서 백화점은 유행을 만들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량생산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으며, 산업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역할을 해내었던 것이다. 백화점은 소비를 연출하는 것을 통해 근대를 끌어 나갔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p.110-111)

5. 미쓰코시를 비롯한 백화점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소비자로 삼은 것이 도쿄 근교의 '야마노테' 거주민들이다.이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새롭게 출현한 중산층 계급으로, 관리, 군인, 학자, 은행원, 회사원 등이 주를 이루었다. 기차, 전철 등 발달된 교통을 통해 매일 도쿄로 통근을 하며, 가정에선 입식 생활양식에 가스·수도·전기를 사용하며 근대를 가장 먼저 경험하기 시작한 도시생활자들이었던 것이다. 백화점들은 서양 황족 등 귀빈을 초대하는가 하면, 학속협동으로 유행연구회니 아동용품연구회를 만들고, 서양제 수입품을 판매하는 한편 자체브랜드를 개발하기도 하면서 소비문화를 중심으로 한 도시생활양식을 구축하고 중상류 계층의 고객을 근대적(내지 백화점 의존적) 소비의 주체로 구성해내는 데 성공한다. "백화점은 화려함의 원천으로 주목되고, 눈을 즐겁게 해주는 무료박람회로서 유한계급이 즐겨 찾는 곳" (p.133) 이 되어갔던 것이다.

6. 백화점은 동시에 일종의 도시 스펙터클이었다. "백화점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온 고급 이미지를 좀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에는 백화점 건물이 해낸 역할은 컸다". (p.133)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진 미쓰코시의 건물은 관람자를 압도한다. 5층까지 천장이 뚫려 있는 홀의 천장으로는 톱 라이트가 설치되어,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빛이 아래층까지 떨어져 내린다. 당시 최첨단 시설이었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그리고 냉방 설비도 미쓰코시, 시라키야 등의 백화점에서 앞다투어 도입되었다. 쇼핑하는 가족을 위해 백화점 내에 식당을 만들고, 옥상에는 정원과 놀이기구를 설치하여 간이 유원지를 만들었다. 백화점은 "건물 밖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도시", "밖의 세계와는 완전히 차단된 꿈의 세계" (p.139) 이자 그 안에서 화목을 연출하는 근대적 핵가족의 유람장이었던 것이다.

7. 그렇게 백화점은 일본인의 일상을 잠식하고 그들을 근대적 소비의 주체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식민지 조선에도 이식된다. 이상의 [날개]에도 등장한, 진고개(명동)에 우뚝 서 있던 미쓰코시 경성점(현 신세계백화점)은 그러한 이식된 근대의 상징이었다. 식민지인은 근대의 매력에 매료되고, 이율배반적으로 도취된다.
전시된 '근대'의 크기, 높이, 밝기, 다양함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식민지 조선 현실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매력 덩어리 근대는 식민지에서는 불완전하였다. 그 불안이 도리어 식민지 사람들을 초조하게, 신나게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근대의 속도를 조절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더 도쿄를 동경했는지도 모르며, 급속하게 도쿄를 닮아가면서 모방의 근대를 만끽했는지도 모른다. (역자의 말, p.12-13)
1930년대 경성을 거닐던 모던보이와 나의 미감은 그런 점에서 닮아 있다. 근대의 풍경/스펙터클을 소비하는 방식, 어쩔 수 없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관조(이를테면 이명박의 청계천을 바라보는 방식), "보는 사람으로서만 세계와 관여"하려 하는 태도. 정말 청산되어야 할 식민지 유산은 식민사관이나 일본말 찌꺼기 같은 것보단 우리가 근대를 욕망하는 방식 자체가 아닐까. 이 책이 속한 [일본근대스펙트럼] 시리즈 기획위원의 지적은 그런 의미에서 유효적절하다.
식민지 조선사회를 형성하였던 근대의 맹아, 근대의 유혹과 반응, 그리고 그 근대의 변모들을 거대 담론으로 재단하기에는 근대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근대는 일상의 승리였으며, 인간 본위의 욕망이 분출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p.6)
이 책은 논형에서 기획한 [일본근대스펙트럼] 시리즈의 첫 권으로, 시리즈는 현재 7권인 [호텔]까지 출판되었다. 각 권은 박람회, 일본의 군대, 미나카이백화점, 운동회, 만국박람회, 호텔 등을 주제로 "근대라는 빛이 일본사회 속에서 어떤 다양한 색깔을 띠면서 전개되었는지"(p.6)를 조망하고 있다(한질 지르고 싶다). 비슷한 시기 조선의 일상사 이야기인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같은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추가. 이 논문도 재미있겠다.

탈근대의 신학은 어떤 모습이어얄까 - [죽은 신을 위하여]

Posted 2008. 3. 9. 23:4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죽은 신을 위하여(양장본) 상세보기
슬라보이 지젝 지음 | 길(박우정) 펴냄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신이 죽은 사회, 다시 말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유형의 대의를 부정하며 소소한 쾌락을 누리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사회는 오히려 삶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탈형이상학적 생존지상주의의 끝은 먹기 위해 사는 삶, 죽음과 다름없는 삶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원제인 '


바야흐로 포스트-모던이다. 근대의 오만에 대한 성찰적 어쩌고 전지구적 시민사회의 구축이 저쩌고... 이제 우리는 근대적 합리성에 탈근대적 성찰성까지 갖추었으니 정말로 역사는 완결된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역사는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지구화에 수반되는 노동력의 자유로운 (노동자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는) 이동과 함께 노동계급 내에서의 인종차별과 증오가 확산되고 있다. '모던'의 한 축이었던 사회주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더더욱 심하다. 박노자가 지적하듯 "보통" 국민 국가로 돌아간 러시아에서는 비러시아인에 대한 끔찍한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헌팅턴 류의 문명충돌 얘기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슬람, 유대, 기독교에 공통되는 '근본주의'가 중동과 세계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주류' 개신교가 어떤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지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애저녁에 졸업했어야 할 민족, 종교 나부랑이가 다시 득세를 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왜 멋진 탈근대 세계가 야만으로 되돌아가는가?

혹은 이에 대처하는 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만들어진 신] 같은 계몽/소아병적 비판? 혹은 '개독까'의 예수천국 불신지옥 비난? (일단 "예수천국 불신지옥" 에 대한 고찰, 대한민국에 주류 기독교란 없다. 를 읽어보라) 아니면 그리스도의 희생을 잔인한 교의라고 공격하며 민중과 함께한 체 게바라 풍 혁명가 예수를 그려내기? 그도 아니면 '영성' - "모종의 근본적인 경험", "근본적인 타자성을 향해 스스로를 개방함으로써 뭔가 특별한 윤리적 태도를 획득하는 방식", "압도적인 향유의 형태를 경험하는 방식"(p.11) - 같은 고도로 세련된 자위행위?

지젝은 이런 질문에 대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뒤집어 "'신학'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한다"(p.5)고 잘라 말함으로써 '정면승부'를 시도한다. 역자가 지적하듯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의 혹은 이념은 이제 종교적 신념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이 유력한 이념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p.280)이며, 다시 말하면 "그러니까 믿어 안 믿어?" 라는 '저속한' 질문 (p.11)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젝의 주장은 명확하다. 기독교의 교의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 보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쪽)

주체로부터의 초월이란 교리를 통해 파시즘에 동원되거나 서양에서 취향으로서 소비되는 불교, '세속적' 쾌락을 보장해 주는 현행 기독교("너는 욕망에 마음껏 탐닉하며 삶을 즐겨도 좋다. 내가 이미 그 값을 치렀으니!" - p.83), "본연의 인간의 잔여"로서의 유대인·유대교를 차례로 비판하며, 지젝은 진정한 기독교 -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적 접근 - 적 경험만이 적절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타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의 핵심은 신 자체의 분열/균열이다. 타 종교에서 신과 영원의 세계는 인간과 분리되어 있으며 죽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내세로 그려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은 스스로 '타락'을 자초한다.

인간이 신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신이 인간을 신 자신에게서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 자체에 이러한 분리가 반영되어 신이 신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하는 것이다. (p.26)

전형적인 무신론에서 신은 더 이상 자기를 믿지 않는 인간들에 대해서 죽는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신은 신 자신에 대해서 죽는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도가 범할 수 있는 궁극의 죄를 범한다. 믿음(Faith)이 흔들리는 죄. (p.27)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 신이 바로 이 균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는 균열에 의해 인간과 분리된 피안의 신이 아니라, 균열 자체, 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다.
(p.42)

죄악을 저지른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희생양으로... 운운의 신학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어(타락하여) 신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 그리고 그 타락 속에 구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타락은 사실 전혀 타락이 아니라 '자체로' 타락의 정반대, 자유의 출현이다. 타락 이전의 순수 상태는 없다. 타락 이전은 그저 어리석은 자연적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과거의 '보다 높은'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을 변형하는 것이다." (p.140)

결국 그의 작업은 "기독교 이념에 근거하는 윤리적 주체를 재정립"(p.289) 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행 기독교'의 체제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책의 끝머리에서 그는 기독교의 핵심에는 대타자-'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에 대한 부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신실한 기독교인을 고민케 하는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을 구제하는 것은 제도적 조직의 껍데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종교적 형식을 버리거나 형식을 유지하며 본질을 잃거나 둘 중 하나다. 기독교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영웅적 행위가 이것이다. 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 (p.277)

글솜씨가 없어 이 글만 보면 이게 뭔소리야 엉터리 비약 논리로 보이지만, 직접 읽어 보면 기독교의 교의에 대한 훨씬 풍부한 사유의 지점, 새기면서 읽을 구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그 전개되는 속도와 범위를 따라갈 수 있냐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나도 읽다 체했다. 체한 흔적은 이곳에). 기독교 신자는 물론, '탈근대'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 상세보기
찰스 프레드 앨퍼드 지음 | 황금가지 펴냄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가 68명의 다양한 사람들과 직접 면담하면서 인간이 악에 굴복하는 이유를 밝힌 책. 이제껏 실체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악'의 실체를 평범한 일반인, 교도소에 복역 중인 흉악범, 엽기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 환자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규명하였다. 저자는 악의 개념과 범주에 대해 묻는 면담조사 결과 모든 이들의 대답에는 한결같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내포되어 있었음을 발견해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어떤 재소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 기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아 줄 사람이 필요했소. 난 잠시 동안이나마 누군가가 나를 느껴 주기를 바란 거요." (p.108)

악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 책의 원제(what evil means to us)이기도 한 이 오래되고 진부한 질문에 답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저자는 '악'에 관심있는 일반인들, 그리고 연쇄살인, 존속살해 등 '흉악범죄'의 재소자들과 함께 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대부분은 '불행한' 것이 맞다. 공통적으로 어렸을 때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고(물리적으로든, 냉담함과 돌보지 않음이라는 형태로든), 그 결과는 가학증이나 피해자에 대한 공감력의 상실, 그리고 범죄행위로 나타난다.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에 등장하는, 강도 행각 끝에 일가족을 엽총으로 살해한 페리 스미스는 그러한 불행한 살인자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 상세보기
트루먼 카포티 지음 | 시공사 펴냄
실제 범죄의 생생함을 문학으로 형상화 낸 논픽션 소설. 저널리즘의 방법론과 소설의 작법을 동시에 적용한 작품으로, 하나의 잔인한 범죄가 일어나게 된 사회의 모든 파장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재구성하였다. 1959년 캔자스 주 조용하고 작은 동네 홀컴에서 일가족 네 명이 엽총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작은 액수의 현금만이 사라졌을 뿐, 이 처참한 살인 사건의 원인은 쉽게 밝혀지지 않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이는 옆에 앉은 남자를 분노하며 쳐다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일종의 동정을 느꼈다. 페리 스미스는 일생 동안 한 번도 온실에서 보호받으며 살지 못했으며, 불쌍하고, 추하고 외로운 과정을 겪어 하나의 망상에서 다른 망상으로 옮겨 다닌 것이다. ...... 던츠가 스미스에게 물었다.
"그럼 다 더해서, 클러터 네서 돈을 얼마나 가져간 건가?"
"40에서 50달러 정도요."
- 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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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스미스. AP/World Wide Photos


그러나 범죄자에 대한 증오만큼이나 연민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자는 유영철의 예를 들어, 범죄에 대한 엄벌주의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 둘은 동일한 것이다. 악을 인간성 바깥으로 격리시켜야 하는, 근절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악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결코 뿌리뽑혀지지 않을) 악과 화해하는 능력, 내 안에서 선과 악을 통합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 친구들, 연인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 속에 있는 이러한 적의의 파괴성을 인식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이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악의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이 왜 이러한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우리가 왜 이러한 사람들과 한 세상에서 살아가는가?'와 관련된 복잡한 질문이다. (p.267)
그러나 이 책은 정신분석의 이론을 바탕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읽기가 만만치 않다. 나처럼 인상적인 부분을 표시해가며 잠언집처럼 읽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독서법일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읽으면서 종종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범죄자들'의 심리상태와, '악'의 병후들에서 종종 나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상깊게 보았던 구절은 이곳에 표시해 두었다.)
"페리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집에서 자란 것 같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앞문으로, 그는 뒷문으로 나간 것 같았지."
- 영화 [카포티] 중
이러한 감정은 역설적으로 일종의 위안을 준다. 나의 마음이 비참하고 황폐하다는 것을 느끼는 만큼, '악'에 대한 공감 내지는 '악인'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지는 것이니까. 나도 저러한 악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섬뜩하기도 하지만 나도 그의 입장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는 느낌은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을 넘어서서 어떤 공감을 형성한다.

그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끔찍한 살인과 그 이상의 악행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지 가능한 것"(p.14)이 될 터이다. 두 권 모두 읽으면 기분은 우울해질 테지만 한 번쯤 읽어 보기를 권한다. 악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리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P.S. 숭례문 화재의 범인이 검거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에게 어떤 증오를 뿜어낼 것인가, 혹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를 멋대로 심판내리기 전에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일산 땅 보상금을 못 받은 분풀이로 범행을 저지르는 마음과 땅값이 뛰기 때문에 몰래 대운하를 지지하는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다른가?

조모임을 XP로 할 순 없을까 -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Posted 2008. 1. 22. 14:05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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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한국 XP 사용자 모임 (http://xper.org/)


켄트 벡·신시아 안드레스, 2006.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김창준·정지호 역, 인사이트.

이미 나온지 좀 된 책이고, 훌륭한 서평도 많이 나와 있다. 아래의 링크들을 참조하라.


이 책의 원제는 eXtreme Programming explained. 어떻게 하면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책이다. 나는 프로그래머도 아니고 IT업계 종사자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문과 대학생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유효한 것은 XP가 '협업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식으로 하면 훌륭하게 되는가"(남승희)에 대한 이야기. 꼭 프로그램을 하지 않아도, 직장생활을 하지 않아도 협업을 할 일은 많다. 동아리를 하든, 학생회를 꾸리든, 하다 못해 수업에서 조모임을 하든.

조모임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서 팀을 이루고 제한된 시간 안에 주어진 과제를 해내야 하는 일. 팀원들을 공간적으로 묶어주는 끈도 (전업 직장인에 비해) 약하다. 그래서 종종 실패하기도 한다. '실패'란 조모임이 엎어진다거나 하는 일도 포함하지만, 대개는 한두사람이 프리라이딩을 하고 소수가 일을 떠맡아 고생하며 나머지는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결과물로 지루한 발표와 짜깁기 보고서를 산출하는 것을 말한다.

실패하는 조모임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지닌다:

  • 분공을 나눈다
  • 얼굴을 맞대고 논의하지 않는다
    ex) 그럼 각자 주제를 게시판에 올려보도록 하죠. MSN에서 만나서 얘기하죠.
          단언컨대 온라인에서의 어떤 조모임도 오프라인만큼 강력하지 못하다.
  • 의사결정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 누구도 조장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
  • 책임의 분산, 눈치보기 등등

여하한 조모임적 인간관계에 진저리가 난 나머지, 핸드폰에 조원의 이름을 조모임1, 조모임2 식으로 저장해놓고 조모임 끝나면 지워 버린다는 친구도 있었다. 나름대로 팀웍을 배운다는 구실로 도입한 제도인데 이런 식으로 '사무적' 인간관계에 대한 냉소를 배워 나가면 곤란하지 않을까.

XP는 잘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팀,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위에서 언급된 실패하는 팀의 공통점은 회피하고 있다는 것, 도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으로부터, 투명함으로부터, 평가로부터. XP는 그러한 팀에게 일정부분 고통일 수도 있을 것이다. "XP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공개한 다음 그걸 해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은 "노출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지도 모르"(p.23)기 때문에.

종종 이 책의 지적은 예리하고 아프다. 안락한 골방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도.
XP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니까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나를 혼자 내버려 두기만 하면 돼." 같은 사춘기적 앳된 자신감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p.23)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뭔가를 유보해두는 오래된 습관은 사실 효과가 없다. 마지막 20%의 노력을 쓰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나를 지켜주지는 않는다. ...... 인간관계에서 약간 거리를 두는 것, 일을 너무 적게 하거나 많이 함으로써 노력을 유보해 두는 것, 책임 소재를 한 번 더 흐리기 위해 피드백을 미루는 것, 이런 행동 가운데 어떤 것도 XP 팀에는 있을 자리가 없다. (p.28)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을 통해 주어진 것만 완벽하게 처리하고, 자신의 성실함을 무기로 팀과의 협업과 조율에 무관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다" (p.28의 인용에 대한 코멘트, by 대마왕)
결코 개인의 뛰어난 역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협업은 종종 착취관계로 비화되기도 한다. 요는 어떻게 좋은 팀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절대 없어서는 안 될 프로그래머가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를 프로젝트에서 제거하라.
[프로그래밍 심리학], p.202
이 책은 '좋은 팀' 만들기에 대한 친절한 실천방법들을 제공한다. 짝을 이뤄 프로그래밍을 할 것, 짧은 시간 단위로 빌드하고, 통합하고, 자동화된 테스트를 사용할 것, 처음부터 완성된 설계도 대신 점진적인 설계방식을 가져갈 것 등등.  비프로그래머로서는 전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그 기저에 깔린 원칙들에 동의할 수 있다면 조모임을 진행하면서 곁에 두고 보면 좋을 책이다.

XP 의 각론들을 "요리책" 내지 잠언집처럼 챙겨 볼 필요도 있지만, 그것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일은 아니다. "팀이 XP를 하고 실패한다면, 그것은 팀이 순수한 폭포수 모델을 사용해서 성공하는 것보다 좋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목표는 성공적이고 만족을 주는 인간관계와 프로젝트이지, XP 클럽 회원이 되는 게 아니다."(p.208)

그보다는, 나 같은 문돌이/제너럴리스트에게는 더더욱, 실천방법 너머에 있는 가치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의사소통, 단순성, 피드백, 용기, 존중.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훤하게 드러내는 것, 그러기 위해 최대한 단순하고 효율적인 것, 언제나 말할 수 있는 것, 요청할 수 있는 것, 믿을 수 있는 것".(남승희)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첫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은 사회적 변화에 대한 것이다."(p.23) XP는 우리의 조모임에도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협업과 팀웍의 문제로 고민하는 대학생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PS #1
조모임에의 참여가 소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단지 소모적이고 일시적인 관계로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강의 기획 차원에서 수업과 좀더 통합된 팀활동을 조직하고... 류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이런 얘기는 어떨까? :)
제 선배 중에서 학부 시절 조모임에 올인하다 만난 여학생과 결혼에 골인한 분도 있습니다. by qbio

PS #2
책을 읽으면서 가장 웃겼던 부분이라면 주저없이 아래 구절을 꼽겠다. ;)
프로그래머들이 호의와 성적 관심을 구별할 정도의 감정적 성숙을 이루지 못했다면, 자신과 성별이 다른 사람과 일하면서 팀의 이익에는 최선이 아닌 성적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짝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그런 감정이 일어난다면, 자기감정에 책임을 지고 그 감정에 대처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과 짝 프로그래밍을 멈추어라. (p.81)

첫 번째 책을 집다

Posted 2008. 1. 17. 03:0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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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제공 yes24



그것은 올해 11월쯤이었습니다. 너무 심히 매우 책을 안읽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그때 페이퍼백 추리 소설을 두 달 동안 잡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아 이러다 큰일나겠구나. 이대로 멍텅구리가 돼버리겠구나. 그런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던 주변의 한량들과 의기투합해 2개월에 걸친 대기획 끝에 이런 팀블로그를 만들게 되았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project bibliothek (가칭).
도서관에는 많은 책들이 있어요. 정말 많은 책들이. 그러나 대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그 중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까요? 아니 몇 개의 서가나 뒤져볼 수 있을까요? 전공 따라 맨날 가는 데만 가다가 어영부영 졸업하기 십상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을 한번 훑기로 했습니다. 십진분류법에 따라 000부터 900까지, 각 카테고리별로 매주 한 권씩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프로젝트입니다.

첫 주의 카테고리는 000, 총류.
간만에 산만한 백팩을 메고 학교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총류에는 주로 전산/IT쪽 책들이 많지만, '총류'이니만큼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얽혀 있는 게 묘미입니다. 책에 대한 책들도 있고,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류의 B급 미스테리서적, 저널리즘 책, 사회조사방법론까지 뭐 대중없습니다. -_-; 덕분에 한바퀴 돌면서 이런저런 책들을 집다 보니 대출한도를 금방 채워버렸네요.

어쨌든 제가 이번 주에 읽을 책은,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입니다. 굳이 프로그래밍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여러 사람이 모여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식으로 하면 훌륭하게 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어서랄까요. 즐거운 독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서평으로 찾아뵙도록 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