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탄에 있는 상하이 세관. 빅 벤을 흉내낸 시계탑에 유의
나도 너도 이런 곳에 태어날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일제 시대 초반 친일파 졸부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어디 유럽 쪽으로 유학이나 가서 사는게 꿈이라면 꿈이겠네.
일본에서 태어났더라면 다이쇼, 혹은 메이지시대에.
유럽 쪽이라면 로코코로 부탁해.
어느 때 어느 곳이든 돈은 많아야지.
그래야 아무 것도 생각 안 하고 상병신처럼 낭만과 꿈을 바랄 수 있을테니까.
클래식보다는 기묘한 레트로가,
바로크보다는 절도 없고 문란한 로코코가 좋아
by 시음, [워너비 모던걸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러 '쾌락원'을 만들어 사람을 모을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권공장을 찾아들었다.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는 권공장에 모여, 그 시끌벅적 흥청거리는 인파를 뚫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즐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p.62)
사람들은 뭔가를 사기 위해서 백화점에 오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에 들어가면서부터 비로소 무엇인가 갖고 싶은 것을 찾아내게끔 되었던 것이다. ...... 근대사회 속에서 백화점은 유행을 만들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량생산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으며, 산업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역할을 해내었던 것이다. 백화점은 소비를 연출하는 것을 통해 근대를 끌어 나갔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p.110-111)
전시된 '근대'의 크기, 높이, 밝기, 다양함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식민지 조선 현실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매력 덩어리 근대는 식민지에서는 불완전하였다. 그 불안이 도리어 식민지 사람들을 초조하게, 신나게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근대의 속도를 조절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더 도쿄를 동경했는지도 모르며, 급속하게 도쿄를 닮아가면서 모방의 근대를 만끽했는지도 모른다. (역자의 말, p.12-13)1930년대 경성을 거닐던 모던보이와 나의 미감은 그런 점에서 닮아 있다. 근대의 풍경/스펙터클을 소비하는 방식, 어쩔 수 없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관조(이를테면 이명박의 청계천을 바라보는 방식), "보는 사람으로서만 세계와 관여"하려 하는 태도. 정말 청산되어야 할 식민지 유산은 식민사관이나 일본말 찌꺼기 같은 것보단 우리가 근대를 욕망하는 방식 자체가 아닐까. 이 책이 속한 [일본근대스펙트럼] 시리즈 기획위원의 지적은 그런 의미에서 유효적절하다.
식민지 조선사회를 형성하였던 근대의 맹아, 근대의 유혹과 반응, 그리고 그 근대의 변모들을 거대 담론으로 재단하기에는 근대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근대는 일상의 승리였으며, 인간 본위의 욕망이 분출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p.6)
인간이 신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신이 인간을 신 자신에게서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 자체에 이러한 분리가 반영되어 신이 신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하는 것이다. (p.26)
전형적인 무신론에서 신은 더 이상 자기를 믿지 않는 인간들에 대해서 죽는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신은 신 자신에 대해서 죽는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도가 범할 수 있는 궁극의 죄를 범한다. 믿음(Faith)이 흔들리는 죄. (p.27)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 신이 바로 이 균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는 균열에 의해 인간과 분리된 피안의 신이 아니라, 균열 자체, 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다.
(p.42)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을 구제하는 것은 제도적 조직의 껍데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종교적 형식을 버리거나 형식을 유지하며 본질을 잃거나 둘 중 하나다. 기독교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영웅적 행위가 이것이다. 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 (p.277)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어떤 재소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 기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아 줄 사람이 필요했소. 난 잠시 동안이나마 누군가가 나를 느껴 주기를 바란 거요." (p.108)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이는 옆에 앉은 남자를 분노하며 쳐다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일종의 동정을 느꼈다. 페리 스미스는 일생 동안 한 번도 온실에서 보호받으며 살지 못했으며, 불쌍하고, 추하고 외로운 과정을 겪어 하나의 망상에서 다른 망상으로 옮겨 다닌 것이다. ...... 던츠가 스미스에게 물었다.
"그럼 다 더해서, 클러터 네서 돈을 얼마나 가져간 건가?"
"40에서 50달러 정도요."
- 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p.383
페리 스미스. AP/World Wide Photos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 친구들, 연인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 속에 있는 이러한 적의의 파괴성을 인식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이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악의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이 왜 이러한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우리가 왜 이러한 사람들과 한 세상에서 살아가는가?'와 관련된 복잡한 질문이다. (p.267)그러나 이 책은 정신분석의 이론을 바탕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읽기가 만만치 않다. 나처럼 인상적인 부분을 표시해가며 잠언집처럼 읽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독서법일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읽으면서 종종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범죄자들'의 심리상태와, '악'의 병후들에서 종종 나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상깊게 보았던 구절은 이곳에 표시해 두었다.)
"페리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집에서 자란 것 같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앞문으로, 그는 뒷문으로 나간 것 같았지."이러한 감정은 역설적으로 일종의 위안을 준다. 나의 마음이 비참하고 황폐하다는 것을 느끼는 만큼, '악'에 대한 공감 내지는 '악인'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지는 것이니까. 나도 저러한 악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섬뜩하기도 하지만 나도 그의 입장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는 느낌은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을 넘어서서 어떤 공감을 형성한다.
- 영화 [카포티] 중
이미지 출처: 한국 XP 사용자 모임 (http://xper.org/)
XP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니까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나를 혼자 내버려 두기만 하면 돼." 같은 사춘기적 앳된 자신감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p.23)결코 개인의 뛰어난 역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협업은 종종 착취관계로 비화되기도 한다. 요는 어떻게 좋은 팀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뭔가를 유보해두는 오래된 습관은 사실 효과가 없다. 마지막 20%의 노력을 쓰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나를 지켜주지는 않는다. ...... 인간관계에서 약간 거리를 두는 것, 일을 너무 적게 하거나 많이 함으로써 노력을 유보해 두는 것, 책임 소재를 한 번 더 흐리기 위해 피드백을 미루는 것, 이런 행동 가운데 어떤 것도 XP 팀에는 있을 자리가 없다. (p.28)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을 통해 주어진 것만 완벽하게 처리하고, 자신의 성실함을 무기로 팀과의 협업과 조율에 무관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다" (p.28의 인용에 대한 코멘트, by 대마왕)
절대 없어서는 안 될 프로그래머가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를 프로젝트에서 제거하라.이 책은 '좋은 팀' 만들기에 대한 친절한 실천방법들을 제공한다. 짝을 이뤄 프로그래밍을 할 것, 짧은 시간 단위로 빌드하고, 통합하고, 자동화된 테스트를 사용할 것, 처음부터 완성된 설계도 대신 점진적인 설계방식을 가져갈 것 등등. 비프로그래머로서는 전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그 기저에 깔린 원칙들에 동의할 수 있다면 조모임을 진행하면서 곁에 두고 보면 좋을 책이다.
[프로그래밍 심리학], p.202
제 선배 중에서 학부 시절 조모임에 올인하다 만난 여학생과 결혼에 골인한 분도 있습니다. by qbio
프로그래머들이 호의와 성적 관심을 구별할 정도의 감정적 성숙을 이루지 못했다면, 자신과 성별이 다른 사람과 일하면서 팀의 이익에는 최선이 아닌 성적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짝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그런 감정이 일어난다면, 자기감정에 책임을 지고 그 감정에 대처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과 짝 프로그래밍을 멈추어라. (p.81)
이미지제공 yes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