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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Posted 2008. 2. 20. 23:49 by 알 수 없는 사용자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방곤 역, (문예출판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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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가로서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휴머니즘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인간세상엔 수많은 가치들이 존재한다. 그 가치들을 내면화한 양식,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추상, 사회적 조건에 기대어 불거진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들이 구상화된 각종의 정치사상들 역시 제각각 존재한다. 정신의 범람 속에 인간이 조금이나마 우위에 두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절대적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실존이지 않은가? 실존, 즉 나 자신을 위해 살려면 나는 세상 속의 무엇이어야 하는가? 요런 질문들에 대한 간결한 대답이 이 책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실존주의 입문"이다.



1.

긴장.

 우리는 태어나면서 수많은 기성의 가치들을 본다. 그들이 다투는 꼬라지와 새로운 가치의 탄생과 그 가치의 소멸들을 본다. 가치를 위한 가치, 가치를 내면화한 논리들이 만든 제각각의 모랄들은 끝없이 우리를 긴장시키고 제약한다. 스스로 온전히 탈가치적일 수 있는(실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풍운아가 아닌 이상, 우리 개인은 스스로의 의식을 끝없이 가늠하고 결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는 나와 세상의 존재가 양립하는 존재의 조건이다. 결국 내면화하느냐, 혹은 의심하느냐에 따라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는 구체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향한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상식일 것이다.  
 
 이로써 세상사는 부단한 수정과 조절과 투쟁을 예고한다. 아주 사소한 예에서 매우 거대하고 실천적인 예에 이르기까지, 가치를 위시하는 충돌과 투쟁들은 그렇게 상대의 것을 탈취하고 정당화하는 논리를 내재하며, 그 정당성이 또 다시 만들어내는 모랄의 무게가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지향"에 대한 문제가 된다. 더구나 이는 개인의 일관성과 자존감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표면에 내세운 가치와 그 가치를 존중하는 이의 정신적 존엄을 위한 갈등이며, 그를 위한 희생을 위로 받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거창하게는 말이다.



2.

진리.

 그 모든 갈등이 형상화되기 위해 많은 조건과 이야기들이 존재하듯이, 역사 속에 이러한 조건들은 제각각의 진정성을 확보하곤 한다. 진리와 정의는 이러한 조건과 그 속의 진정성에서 다시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주의의 진정성은 그러한 시대의 지배조건과 정치적 움직임, 망딸리떼에서 비롯한다. 시대의 가치를 두고 벌이는 논리의 대결이 어떠한 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참여하는 인간의 희망 또한 제각각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진정으로 그 가치를 음미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그로 인한 성찰의 여유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로서 "신은 죽었다"의 명제를 지지했다. 이는 이 최소한의 자유 의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100퍼센트 지지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을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설득할 수 있는 의지.
이 때 개인이 지지해야할 가치는 스스로의 발견물이다. '절대자'가 '진리'라는 이름으로 줄 수 있는 선물도 아니고, 스스로의 탐구와 선택항의 축적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절대의 진리를 따르는 체계, 즉 신을 따르는 종교나 정치적 테제를 따르는 이데올로기가 모두 공격의 대상이다.
 이것은 진리를 믿고 선택한 인간의 의지, 즉 한 인간의 신념을 비하하기 위함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패배적 경멸을 실존주의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 신념을 영원한 것이라 말하는 신념의 체제를 공격할 뿐이다. 신념은 만들어지는 것이되 영원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신념이 다른 이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할 당위라는 것 또한 턱없는 일이다.

 좀 더 이야기 하면,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신념 또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유의미한 것은 개인의 자유에 의한 선택이지, 선택 이전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 선택은 영원하지 않은 대신 무한한 것이어서, 인간은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으로 인해 결코 일관될 필요도, 심지가 굳은 인간일 필요도 없다. 그것 또한 실존적 자유가 보장하는 가능성의 범주다.


"사람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원하는 그대로이다. 그리고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떄문에 사람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제 1 원칙이다. 이것이 또한 사람들이 주체성라고 부르는 것이다." (16.p)



3.

책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이 경박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무한한 자유와 선택에 그 자신만의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스스로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한 이후에나 그 실존을 논할 자격이 있다는 거다.
 가장 무난한 인간이라면 세상에 불화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구축하는 개인이다. 그가 아무리 자유롭게 실존적인 선택들을 반복한다 해도, 세상은 그 결과에 대해 언제나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만약 스스로 완성된 어느 한 명의 잘난 이가 있어, 그가 세계를 배신하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른바 "실존적 고뇌"를 실천했다고 쳐보자. 때에 따라 이는 공동의 합의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악일 수도 있다. 세계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에 앞서 이 자에게 그 세계는 견딜 수 없는 부조리의 장이다. 부조리는 고통스럽고,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슬프고도 무의미한 현실이다. 실존주의가 너무도 쉽사리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무의미를 견딜 수 없는 철학적 본질이 바로 실존주의 그 자체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한 부조리란 단지 서로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단순히 "유리됨" 혹은 "방종"이 아니다. 단지 방종을 가늠하는 기준이 그 자신의 외부에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떳떳함이다. 떳떳함은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을만큼의 의식적 자유가 내게 존재 했었던가"의 문제다. 즉, 한 인간의 내면에서 하나의 체계를 이룬 (비이성적인 일탈행위나 파괴적 미학 따위가 아닌)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감정과 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가치판단]이 자립할 수 있는 모든 여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역시 개인의 가치와 불화하는 세상을 철저히 주체적으로 응징하려드는 시도다. 사르트르 식이라면 '존재'는 세계에 속하되 그 개인의 '본질'은 세계라는 이해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1)먼저 그 불화의 내용은 개인의 나태함이나 인격적 불완전함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부적응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2)나아가 세상은 그를 단죄함으로써 그의 실존을 배제할 수 있었지만, 그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실존이란 죽음으로 종결될 때까지 꿋꿋하고 자신에 차있었다는 것이다.
 이 전제들로 인해 까뮈는 개인의 실존이 그 자신의 내면에서 완전할 수 있으며, 그가 세상에 지었다는 죄 역시 그 자신에게는 죄가 아닐 수 있음을 주장한다. 세계는 그를 죽이길 원하지만, 그 자신의 죽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자신뿐이다. 세계가 잘못된 것도 까뮈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단지 서로의 부조리가 충돌할 따름이다.



4.

불안.

 그렇기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매우 실존적인 불안이다. 방황하는 인간, 앞을 보지 못하며 현재에 휘둘리는 인간.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인간.
사르트르는 이 때 그 어떤 자조하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불안은 거의 축복이니 즐기는 것이 온당하지 않은가 라고, 오히려 그러한 불안이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나태함[구원에 대한 기대]를 고발하라고. 실존적인 '불안'은 '불성의'를 이겨내는 인간 자유의 표상이며, 그로써 만들어가는 세상은 어떠한 모델도 없는 한 인간 고유의 우주다.

 세상은 이러한 실존적 자유의 집합이어야 하기에,(이것만이 거의 유일한 가치적 당위의 주장일텐데) 제 우주가 존재하는 만큼, 타인의 우주와 공존해야함을 우리는 스스로 깨닫는다.
무엇보다 이 실존적 우주는 그 개개인이 살아가면서 겪은 선택들이 모두 모여 만들어진다는 전제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우월감을 갖지 않으며, 그 모양에 있어 어떠한 모범항도 바라지 않는다. 단지 세계와 맞닿아 있는 그 통로에서 서로 주고받는 손익을 따져 책임소재를 합의해 나가는 것이다. 이 구상은 공동체일 수 있다.  
 
 여기서 실존주의는 '주체성'에 대해 일종의 철학적 당위와 아울러 커다란 가능성을 말한다. 이 당위는 개인이 곧 어떠한 가치에 순응하고, 그로써 타인 혹은 공동체의 가치에 관계를 맺는 '앙가주망angagement'에 의해 거침없이 사회적으로 범람한다. 한 인간이 세계에 대해 앙가제 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는 기존의 사상적 가치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거나,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우주와 타인의 우주가 실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든 앙가주망의 끈을 인식하는 것, 존중하는 것, 거기에서 휴머니즘이 비롯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상황이나 이유에서건 인간으로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너그럽고, 초이해적인 관점을 선사 한다.



5.

진보의 허상.

 만약 보편적 진리가 허상이라면, 정답이 없는 만큼 불안하지만 오답에서는 자유롭다. 여기서 도출되는 지침 하나는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의심이다. 진보를 외치는 모든 움직임은 언제나 그 "절대적인 가치"를 통해 사람들을 유인하기 때문이다. 대신 실존주의자는 "개선"을 주장 한다. 이것은 타당하다. 이는 모든 투쟁적 이데올로기가 근본적으로 전제해 마지 않아야할 인간에 대한 조건, 즉 휴머니즘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투쟁의 완고하고 완전한 승리가 결국 또 다른 가치와 인간형의 완전한 말살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경각심이자 끝없는 고민의 출발이다.
 
 다이 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누구나 다 변해 가지. 변하지 않고 있을 구는 없으니까. 저마다 '인간'의 소재에서부터 진정한 인간으로 변해 가는 거야. 다른 인생길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내고, 다른 인간이 또다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지. 어떤 길에나 인간이 있고 어떤 인간 뒤에도 길이 있어. 길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인간에게는 부침이 있어. 길은 서로 교차되고 인간은 서로 부딪히지. 그것이 인생이야." (222.p)


 물론 이 말을 한 호젠 후는 문화대혁명에서 크게 몸을 덴 사람이고, 계급투쟁의 광기를 어느 정도 열렬하지 못한 휴머니즘적 감성으로 부정하는 인물이다. 실존주의자로서 사르트르가 항상 논쟁을 벌였던 것이 상대가 사회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서 뭔가 묘한 대조이기도 한다. 결국 이는 절대적 가치의 틈에서 좀 더 미세한 가치들과 그에 따른 작은 선택들의 가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단순히 철저하지 못해서라거나, 유아적이라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말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 주의가 아닌 인간의 인생을 긍정하기 위해서, "더 나음을 향하는 가치는 여럿이어야 한다"는 관점을 호젠 후는 몇 십년의 방랑을 통해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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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존주의에 있어 어떤 선택이 기성의 것과 완전히 싱크로 할 수 없다면 반드시 불화한다. 나의 앙가주망이 세계와 불화하여 승리할 수 없다면 산화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란 근본적으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불안하고, 손해보고, 거기다 진지한데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의 실존이 어떠한 내제된 '인간성'이 아니며, 스스로의 행동과 순간순간 저지른 선택의 집합만이 그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거대한 낙관론임은 매우매우 부정하기 힘들다.
 최소한 그들은 공기 속에 뜬 희망이나, 남을 해하기 십상인 신념체계, 거기에 쌀여온 어느 정도의 미학들과 귀를 뚫고 잠입하는 세간의 수많은 이론의 독소들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이 때론 부르주아적이고 패배적이고 심지어는 폭력적일 때도, 이 책이 보이는 최소한의 낙관주의는 무엇보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악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원하고 있다.


"이것이 될까 저것이 될까를 선택하는 것,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악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항상 선한 것이며, 어떠한 것은 전체에 대해서 선하지 않고서 우리에 대해 선할 수는 없다." (18.p)


 내게도 너무 흔한, 의식적 기만과 일종의 나태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그 "일독의 가치"가 있다.      




<Fin>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위안의 철학

Posted 2008. 1. 25. 23:30 by surfysea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 - 몽테뉴 (p.5)


처음 맞이한 대학 생활에 대한 흥분과 실망이 뒤섞여,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대학 1학년 어느 날. 나는 한 일간지 인터넷 담당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이른바 알바생 '막내'이다보니 저녁에 신문 초판이 나오면 신문 뭉치를 1층에 내려가서 가져와야 했다. 이 신문을 사무실의 각 직원들에게 배분하는 것 까지 마치고 이제 본연의 업무로 돌아오면, 웹에 신문기사와 이미지를 포스팅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종이신문의 이미지와 대조하여 확인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날따라 북섹션이 눈에 들어왔다.

"와, 이거 재미있겠는데?"

그날 일이 끝나자마자 근처 서점에 들러 구입한 책이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이다. 새 책을 소중하게 안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 나는 정신없이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나는 어느새 이 젊은 철학자의 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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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1969년생.


어느새 나는 군대에 다녀오고, 정신없는 복학생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전공서적을 사려고 인터넷서점에서 이것저것 보던 중,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알랭 드 보통, 정명진 역, 생각의나무, 2005)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말이다.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전공서적과 같이 주문했으나, 학업의 압박(정확하게 말하면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 때문에 책은 한참을 책꽂이에만 꽂혀 있다가 이제야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사실은 대학 졸업반임에도 일이 뭔가 계획대로 풀려나가지 않는 나의 현실에, 알랭 드 보통이 나에게 어떤 암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는 것이 맞겠다. 마치 대학 1학년 때의 어떤 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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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인터넷교보문고


surfysea의 두 번째 포스팅 100(철학)편에서 소개하는 이 책은 예전에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이건 개정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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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리패키징 앨범을 자주 내서
초기에 앨범을 구입한 팬들을
슬프게 하는 가수도 있다.


이 책은 서양 철학 전반을 훑고 있는 것은 아니고, 저자가 '위안의 철학'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몇 명의 철학자를 소개하며 에세이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1. 소크라테스: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
  2. 에피쿠로스: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
  3. 세네카: 좌절에 대한 위안
  4. 몽테뉴: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
  5. 쇼펜하우어: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6. 니체: 곤경에 대한 위안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기억에 남았던 것은 "좌절을 설명하는 세네카의 사전" 중 "불공평" 부분이다. 드 보통은 세네카(우리가 윤리시간에 배웠던 스토아학파의 일원이다)의 저작 전편에서 한 가지 관념이 되풀이해서 나타남을 이야기한다. 우리 인간은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한데다 또 납득할 수 있는 좌절에 봉착한 경우에는 잘 참아 넘기는 반면, 예상하지 못한 좌절을 겪으면 엄청난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철학의 임무가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라 말한다.

...... 어떤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을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재앙으로 고통 받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며 그 사건을 정의의 도식으로 풀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부조리하게 비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두 가지 생각 사이를 왔다갔다하게 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결국엔 나쁜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 곳에 자리잡는 한편, 자신은 진정으로 말하건대 악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정의의 집행이 부른 대실패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기분을 느낀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정의롭다는 줄기찬 믿음은 이 세상에는 불공평이 있어왔다는 바로 그 불만 속에 암시되어 있다. (p.148)


저자는 인용 부분과 같은 세네카의 도식을 "운명의 여신은 허리케인과 같은 도덕적 무분별함으로 해(害)를 입힌다"라고 한마디로 정리하는 센스를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누구든 적어도 한 두 꼭지 이상에서 깊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학문이 고도로 전문화된 근대에, 철학은 여러 분과학문들을 탄생시켰지만 막상 자신의 역할은 한없이 축소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대학 초년생 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철학을 공부해보겠다고 설치던 때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책 만큼 철학이라는 것이 나에게 이렇게 위안을 주고 피부에 와 닿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전에 얼마간 이론적인 공부(그래봐야 초보적인 수준이지만)를 했던 것이 이러한 논의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결국 철학이라는 것은 현실의 삶과 맞닿아있어야 그 본래의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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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 뉴시스


문득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진부한 속담이 새삼 떠올랐다. 어떤 것에 대해서 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일수록 배운 것을 써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의심(소크라테스적으로 "자신아 무지한 상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두려움으로 인해 쉽게 자기의 주장을 할 수 없게 된다고들 한다. 그러니 나 같은 얼치기일수록, 자기주장만 강해지고 고집만 세지는 것이다. 이는 일면의 이론으로 사람을 재단하려 해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경계짓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는(사실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절대자'가 된 양 행동한다.

이런 사람들이 치닫는 극단적인 결말은 "연애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왜냐면 연애와 같은 관계에서 '교조적인 정치적 올바름'이 항상 정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가치의 발현은 이론의 틀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관계 속에 깊이 관여하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주장만 하는 것은, 원치 않는 훈수로만 들릴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