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소비의 탄생, [백화점 - 도시문화의 근대]

Posted 2008. 3. 16. 20:3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와이탄에 있는 상하이 세관. 빅 벤을 흉내낸 시계탑에 유의


나도 너도 이런 곳에 태어날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일제 시대 초반 친일파 졸부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어디 유럽 쪽으로 유학이나 가서 사는게 꿈이라면 꿈이겠네.
일본에서 태어났더라면 다이쇼, 혹은 메이지시대에.
유럽 쪽이라면 로코코로 부탁해.
어느 때 어느 곳이든 돈은 많아야지.
그래야 아무 것도 생각 안 하고 상병신처럼 낭만과 꿈을 바랄 수 있을테니까.
클래식보다는 기묘한 레트로가,
바로크보다는 절도 없고 문란한 로코코가 좋아

by 시음, [워너비 모던걸까지는 아니더라도]

1. 얼마 전에 인천 차이나타운을 다녀왔다. 그러나 차이나타운보다는 근대건축물 거리에 더 눈이 갔던 것이 사실이다. 인천/제물포는 조선 최초의 개항장 중 하나였고 조계지이기도 했던 만큼 구한말과 식민지시기의 근대 건축물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게 매력이다. 한국인이라면 으레 '가져야 할'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과는 상관없이, 나는 이런 건물들이 그렇게 이쁠 수가 없다. 예전에 상하이를 갔을 때도, 가장 매혹되었던 곳은 다름아닌 와이탄이었다. 반식민지의 조계에 세워진 열강의 아름다운 남근들에 홀려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댔었던 것이다.

2. 근대에 대한 논의는 차고 넘친다. 사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등등의 논쟁, 박정희식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성찰적 논의, '포스트모던' 류의 지적 유희 등등. 그런데 식민지 자손의 이 뒤틀린 '근대적' 미감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걸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에 삽입된, 현기증나듯 아름다운 근대의 흔적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 경험과 함께 우리에게 이식된 근대를 극복하는 작업은 그 근대가 무엇을 구축해 왔는가를 적나라하게, 혹은 충분히 아름답게 드러내 보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조선에서의 개발은 수탈목적이었으니까 무익했다, 라는 결론을 성급히 내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 모국' 일본이 근대적 제도를 어떻게 구축해왔는가를 들여다보는 연구는 중요하다. [백화점]은 근대화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던 메이지 이래 일본의 백화점들이 어떻게 근대적 소비자를 생산했는가를 일본의 권공장-오복점-백화점들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보여 준다.

백화점(일본근대스펙트럼 1) 상세보기
하쓰다 토오루 지음 | 논형 펴냄
이 책은 권공장에서 백화점으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백화점과 상업공간의 근대 일본도시 속 발전과 변용을 밝힌다. 메이지 10년대부터 20년대에 걸쳐서 권공장의 탄생과 발전, 30년대 이후의 백화점 성립과 고객 전략의 전개, 나아가 다이쇼 말기 이후 터미널 디파트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백화점사를, 주요 대상으로 도쿄의 미쓰코시, 시라키야, 마쓰야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자세하게 정리하였다.

3. 백화점의 역사는 박람회에서 팔고 남은 물품을 진열판매하던 '권공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공장은 기존의 상점에서 통용되던 판매방식을 과감히 버린다. 이전에는 주인과 손님이 마주앉아서 손님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창고에서 가져다 보여 주는 식이었는데 비해, 권공장은 진열판매방식을 택해 손님이 걸어다니면서 물품명, 가격 등이 적혀 진열된 물건을 보고 쇼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외에도 입구부터 출구까지 관람인의 동선을 계획했다는 점, 이후 신발을 신은 채 입장이 가능했다는 점 등은 근대적 소비공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에이라쿠쵸의 타쓰노구치 권공장을 시작으로 메이지 35년(1902년)까지 도쿄 시내에만 27개의 권공장이 생길 정도로 그 인기는 선풍적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권공장을 다니는 행위' 자체를 즐기기 시작했다.
일부러 '쾌락원'을 만들어 사람을 모을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권공장을 찾아들었다.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는 권공장에 모여, 그 시끌벅적 흥청거리는 인파를 뚫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즐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p.62)

4.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05년, 미쓰이 오복점은 구미의 '디파트먼트 스토어'를 벤치마킹해서 미쓰코시 백화점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권공장은 메이지 말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여 갔고, 그 바톤을 백화점이 이어받게 된 것이다. 미쓰코시를 비롯한 백화점들은 서양식 부기방식과 진열판매방식, 쇼윈도를 도입하고, PR지를 발행하거나 옷감 도안 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유행을 창조함으로써 근대적 소비와 욕망의 구조를 확립한다.
사람들은 뭔가를 사기 위해서 백화점에 오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에 들어가면서부터 비로소 무엇인가 갖고 싶은 것을 찾아내게끔 되었던 것이다. ...... 근대사회 속에서 백화점은 유행을 만들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량생산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으며, 산업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역할을 해내었던 것이다. 백화점은 소비를 연출하는 것을 통해 근대를 끌어 나갔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p.110-111)

5. 미쓰코시를 비롯한 백화점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소비자로 삼은 것이 도쿄 근교의 '야마노테' 거주민들이다.이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새롭게 출현한 중산층 계급으로, 관리, 군인, 학자, 은행원, 회사원 등이 주를 이루었다. 기차, 전철 등 발달된 교통을 통해 매일 도쿄로 통근을 하며, 가정에선 입식 생활양식에 가스·수도·전기를 사용하며 근대를 가장 먼저 경험하기 시작한 도시생활자들이었던 것이다. 백화점들은 서양 황족 등 귀빈을 초대하는가 하면, 학속협동으로 유행연구회니 아동용품연구회를 만들고, 서양제 수입품을 판매하는 한편 자체브랜드를 개발하기도 하면서 소비문화를 중심으로 한 도시생활양식을 구축하고 중상류 계층의 고객을 근대적(내지 백화점 의존적) 소비의 주체로 구성해내는 데 성공한다. "백화점은 화려함의 원천으로 주목되고, 눈을 즐겁게 해주는 무료박람회로서 유한계급이 즐겨 찾는 곳" (p.133) 이 되어갔던 것이다.

6. 백화점은 동시에 일종의 도시 스펙터클이었다. "백화점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온 고급 이미지를 좀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에는 백화점 건물이 해낸 역할은 컸다". (p.133)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진 미쓰코시의 건물은 관람자를 압도한다. 5층까지 천장이 뚫려 있는 홀의 천장으로는 톱 라이트가 설치되어,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빛이 아래층까지 떨어져 내린다. 당시 최첨단 시설이었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그리고 냉방 설비도 미쓰코시, 시라키야 등의 백화점에서 앞다투어 도입되었다. 쇼핑하는 가족을 위해 백화점 내에 식당을 만들고, 옥상에는 정원과 놀이기구를 설치하여 간이 유원지를 만들었다. 백화점은 "건물 밖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도시", "밖의 세계와는 완전히 차단된 꿈의 세계" (p.139) 이자 그 안에서 화목을 연출하는 근대적 핵가족의 유람장이었던 것이다.

7. 그렇게 백화점은 일본인의 일상을 잠식하고 그들을 근대적 소비의 주체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식민지 조선에도 이식된다. 이상의 [날개]에도 등장한, 진고개(명동)에 우뚝 서 있던 미쓰코시 경성점(현 신세계백화점)은 그러한 이식된 근대의 상징이었다. 식민지인은 근대의 매력에 매료되고, 이율배반적으로 도취된다.
전시된 '근대'의 크기, 높이, 밝기, 다양함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식민지 조선 현실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매력 덩어리 근대는 식민지에서는 불완전하였다. 그 불안이 도리어 식민지 사람들을 초조하게, 신나게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근대의 속도를 조절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더 도쿄를 동경했는지도 모르며, 급속하게 도쿄를 닮아가면서 모방의 근대를 만끽했는지도 모른다. (역자의 말, p.12-13)
1930년대 경성을 거닐던 모던보이와 나의 미감은 그런 점에서 닮아 있다. 근대의 풍경/스펙터클을 소비하는 방식, 어쩔 수 없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관조(이를테면 이명박의 청계천을 바라보는 방식), "보는 사람으로서만 세계와 관여"하려 하는 태도. 정말 청산되어야 할 식민지 유산은 식민사관이나 일본말 찌꺼기 같은 것보단 우리가 근대를 욕망하는 방식 자체가 아닐까. 이 책이 속한 [일본근대스펙트럼] 시리즈 기획위원의 지적은 그런 의미에서 유효적절하다.
식민지 조선사회를 형성하였던 근대의 맹아, 근대의 유혹과 반응, 그리고 그 근대의 변모들을 거대 담론으로 재단하기에는 근대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근대는 일상의 승리였으며, 인간 본위의 욕망이 분출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p.6)
이 책은 논형에서 기획한 [일본근대스펙트럼] 시리즈의 첫 권으로, 시리즈는 현재 7권인 [호텔]까지 출판되었다. 각 권은 박람회, 일본의 군대, 미나카이백화점, 운동회, 만국박람회, 호텔 등을 주제로 "근대라는 빛이 일본사회 속에서 어떤 다양한 색깔을 띠면서 전개되었는지"(p.6)를 조망하고 있다(한질 지르고 싶다). 비슷한 시기 조선의 일상사 이야기인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같은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추가. 이 논문도 재미있겠다.

« PREV : 1 : 2 : 3 : 4 : 5 : 6 : ··· : 17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