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탈근대'


1 POSTS

  1. 2008.02.24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2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Posted 2008. 2. 24. 02:1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신승환, 2003, 살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selfportrait




. 왜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인가
. 포스트모더니즘의 계기
.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사적 이해
. 근대성 비판
.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함의
.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
. 탈형이상학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 우리의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1. 프롤로그



책 이미지를 찾던 중에 우연치않게 찾아낸 에피소드 한꼭지.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 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 한 편으로 신선하고, 또 한 편으로는 컬트만큼 난해하면서(그 당시에는 그랬단 말임), 다른 한편으로는 잘 알아두면 있어보이는 그런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들먹이며 잘난 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말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뭐예요?"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다.
내가 말했다.

"기둥현대주의?"

요절복통.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분위기전환용 접대용 멘트라고 생각하며 실컷 웃었지만, 정말로 뜻을 잘 모르고 그 뜻을 간절히 알고 싶었던 나는 그 웃음소리가 비웃음으로 들렸다.

그로부터 2년 뒤, 우체국에서 방위를 마치고 나온 누군가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우체국의 현대화"


웃을 수 만은 없는 이야기더군요. 비슷한 기억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입니다. 아련한 기억에 담긴 기사 한 꼭지.
'포스트 조던을 찾아라' (쯤 인듯?)
솔직히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포스트?"

  시리얼과 조던의 관계를 엮으려는 부단한 억지부림은 금새 시들해졌습니다. 호랑이의 강인한 이미지와 조던의 얼굴이 교차되기도 했습니다만, 이내 캘로그와 포스트의 관계를 엮으려는 또다른 억지임을 알아채는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포스트'에 대한 물음은 의외로 쉽게 풀렸습니다. 농구에는 골밑 부근에서 펼치는 '포스트 플레이'라는 용어가 있죠.
  '아! 이제는 센터의 시대라는 거구나. 조던의 후계자는 센터다!'
  나름 명쾌(?)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사족이 길었군요. 돌이켜보면, 그 즈음 '포스트'란, 있어보이는 무언가의 총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서구 지성사회의 모더니티 비판이 우리사회에 광풍을 불러온 까닭에 그러했을테지요. '포스트'와 조던은 아무래도 역시 막차 였을법한 지식인 사회의 유희 가깝다고 할까요? 당시의 '포스트조던'은 '포스트모던'이 낳은 문화현상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억지일지는 모르지만.
  언제가 한번쯤은 포스트모던의 막연함과 맞닥뜨린 적이 있으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물리적인 가벼움을 자랑하는 이 책은 정신적으로는 무거움을 안겨줍니다만, 유행으로서 불어닥친 포스트모던의 광풍이 물러간 지금, 철학자의 시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우리의 성찰이 진정성을 담고 있는 이유를 풀어냅니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획?

  '포스트 모던'은 참 생경스럽다. 우리말로 '탈근대'쯤으로 바뀌어 불리지만 역시 불분명하기에는 마찬가지다. 가령 누군가 "포스트 모던적이야" 라는 언사를 던질때, 이에 담겨진 의미를 명확하게 잡아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렇듯 포스트 모던이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다양한 분야에서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리는 통에 그렇다. 문화, 예술, 역사, 철학, 건축 등 포스트모더니즘이 다리를 뻗은 제반 분야는 매우 넓은데, 여기에는 일괄적으로 계보화 되어있지 않은 다양성이 동거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는 복잡다단하게 나타난다. 이 넓고 포괄적인 문화현상을, 더불어 여러곳에 산개한 문화현상을 각론상으로 이해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에는 근대의 일원적인 기획을 넘어설 수 있는 넓은 시선이 담겨있다. 근대의 특징이 보편을 가장한 일방향성, 일원성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에 의해 거세된 다양성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이 담지한 '다양성'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철학적 기획'인 셈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일원성을 넘어서는 다중 언어성으로 이해된다. 문화 현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신의 철학적 기획을 담고 있다. 그러기에 문제는 거듭 개별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현상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기획에 대해 해명하는 작업이다." (15쪽)




3. 보편성을 넘어서는 다원성

  근대는 보편성과 그에 의한 공공성을 전제로 한다. 행위의 가부는 행위주체의 복잡한 알고리즘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연산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사고에 기준이 되는 것이 공공성이다. 계몽주의 근대는 이러한 공공성의 산파 역할을 맡았다. 중세의 신성이 물러난 자리에 근대의 이성이 자리매김하면서, 인간의 합리적 이성은 행위의 기준을 보편성으로 재단하여 공공규율을 만들어 내었다. 공공규율은 태생적으로 사회의 공적가치를 실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공적가치는 어디에서건 개인의 소외를 낳기 마련이다. 애초에 규율이 기대고 있는 보편성에 함정이 숨어있다. 계몽주의 근대는 인간의 보편성을 내세웠을지언정, 실제로는 차별이 존재한다. 한 사회만을 본다면 중세적 신분처럼 공히 드러나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차별성을 갖는 섹슈얼리티 문제나 계층적 한계 등을, 외연을 확장하자면 계몽된 문명(유럽세계)을 유일한 보편성으로 여기는 차별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한다. 이렇듯 보편성의 배면에는 차별이 혼재하는 이유로, 규율은 기득권의 도구로써 차별을 강제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획은 보편성이 타자를 배제하는 차별의 보편성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차별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설정에서 발생한다. 인간이성에 의한 주체설정은 자연스레 객체를 설정하기 마련인데, 여기서 주체와 타자의 도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중심의 보편성, 주체/타자의 차별성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성'을 내세운다.  

"다원성은 보편적 인간 대신 개체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각자에게 상응하는 존재의 원리와 자율성을 허용한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동일한 것. 전체에 얽매이지 않은 차이에 의미를 둠으로써 개인과 개체성, 부분 체계들의 존재공간을 보장한다." (61쪽)

  그렇지만, 역시 현실적인 생명력을 논한다면 포스트모던의 항변은 다소 맥이 빠진다. 인식의 차원에서 보편성을 넘어서는 다원성이 갖는 의미는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만, 저자의 논의에서는 직접적인 현실성을 담보하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조급할 필요는 없다. 근대성 비판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도,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당장의 해답을 찾으려는 강박증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곧 근대의 기획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니다. 근대가 가진 역기능을 성찰, 보완하려는 시도로서, 우선적으로 보편주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더욱이 다원성의 기획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나친 근대성 비판은 정신건강에 해롭다. 세상은 그럼에도, 잘 굴러간다.)  



4. 우리의 근대,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근본적으로 지금, 이곳에 사는 인간의 '자기이해'와 타자에 대한 이해이며, 나아가 그에 대한 해석과 태도결정을 의미"(16쪽)한다. 그러니까 철학은 철학 그 자체를, 또한 철학을 하는 이를 포함한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기획'에 대한 해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동일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한껏 유행을 탔던 이유는 수입학문에 대한 학계의 서구추수주의에 있었다. 그 열기가 쉬이 식어버린 데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는 철학적 성찰이 부재했던 점이 주효했다. 따라서 지금의 문제는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도마에 올려야 한다는 점이다.
  다만 그러기에 앞서 한 가지 주의점이 있다. 탈근대의 성찰은 근대의 기획과 어떤 관계맺음을 갖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전근대의 가치 위에 결과물만을 수용한 근대가 이식되면서 '착종된 근대'로 나아갔다. 우리의 근대가 이렇다면, 그 자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용되었는지를 먼저 살펴야만이 우리의 문제안에서 탈근대를 논의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서구의 근대와 우리의 근대가 갖는 이중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지평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은 내적인 차원에서 해결되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이성에 대한 반발은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인가보다. 그래서 대안으로서 동양사상의 유기체적 사유에 관심을 갖는 모양이다. 우리의 근대를 성찰해야만 하는 까닭은 여기에도 있다.

(유학이나 노장학문과 연관된) "동아시아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포스트모던적이며, 포스트모던은 동아시아의 사유체계와 일치한다는 식의 주장(은)... 논거의 깊이가 보잘것없고 공허하다...(중략) 문제는 동아시아의 철학에 대한 해석에 탈근대의 사유와 그에 다른 기획이 올바르게 담겨있는가에 달려있다. 포스트모던이 근본적으로 근대와의 관계설정에서 제기된 문제라면 포스트모던의 기획을 말하기 위해서는 근대의 기획을 먼저 거론해야 한다. 문제는 '동아시아에 근대의 기획이 존재했는가'라는 명제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는데 있다. 그럼에도 어디에서도 그러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포스트모던이 한창 유행할 때는 마치, 이성의 행진에 지친 서양이 드디어 동아시아의 총체적 세계관을 향해 다가오는 듯이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가. 그것은 정말이지 희극적 포스트모던 논의의 극치이기도 하다." (67~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