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민중의 역사'


1 POSTS

  1. 2008.03.02 작은 것들의 역사, 민중의 역사를 발견하다 - 치즈와 구더기


1. 역사를 생각한다

  한 때 ‘미시사’적인 관점에서 쓰인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주로 ‘~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말이다. 우리가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과정에서 배운 역사는 오로지 거대한 사건들의 연대기적 나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교과서는 주로 정치, 경제, 사회의 세 분류로 나뉘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민중’들이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교과서에서 민중의 역사 혹은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확인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국왕을 중심으로, (주로) 남성이 이끌어 온 전쟁을 중심으로, 또한 그들의 정책을 바탕으로 서술된 역사만을 배웠다. 이런 거대 담론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만을 우리는 흔히 ‘역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미시사와 대응한다는 관점에서 거시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미시사는 특정한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작은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나가 결국에는 커다란 역사에 대한 근거로 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은 방대한 자료를 필요로 하고 역사가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을 깰 수 있는 새로운 시도이다.

  미시사와 같은 역사 서술의 새로운 방법론이 등장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주로 미시사와 신문화사가 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기존에는 정치사 중심이었던 역사 서술이 사회사, 경제사 위주로 변모하면서 보다 역사학은 점차 그 지평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이후 나타난 미시사나 신문화사는 역사 서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시사나 신문화사에서는 역사학이라고 해서 역사학만의 독특한 방법론을 사용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세밀하게 자료를 추적하고 행간을 읽어내는 방법론을 통해 역사적 상상력을 추구한다. 역사학에서 ‘상상력’을 강조하게 됨에 따라 미시사나 신문화사에서는 문학과도 일정한 관련성을 가지게 된다. 대표작으로 『고양이 대학살』, 『마르탱 게르의 귀향』, 『치즈와 구더기』 등이 있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기회로 삼아 예전에 레포트를 위해서 부분적으로만 읽었던 책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2. 치즈와 구더기: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치즈와 구더기: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상세보기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주인공 메노키오가 이단혐의로 피소돼 화형에 이르기까지의 행적과 사고를 마치 추리소설을 쓰듯 생생한 필치로 재현하고 있는 역사학자의 저서. 이탈리아 동북부 프리올라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는 메노키오는 예수의 신성과 마리아의 처녀성,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등 중세 사회에서 이단적인 자신의 생각을 마을에서 이야기 하고 다니다 밀고되는데...

  『치즈와 구더기』는 16세기 한 작은 마을에 살았던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과 세계관에 대해 논한 책이다. 저자인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각종 기록들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16세기 몬테네알레의 메노키오라는 인물을 현실감 있게 복원해 낸다. 도메니코 스칸델라는 이탈리아 동북부 프리울리 지방의 조그만 마을에서 살며 방앗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상 그는 마을 촌장격인 지위였고 글도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는 ‘메노키오’라는 별칭으로 불리었고, 이 인물은 당대의 가톨릭적인 세계관에 배치되는 이단적인 우주관과 세계관을 주장하다 1583년 이단 혐의로 피소되었다. 이후 여러 번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은 1599년에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교회 당국이 메노키오를 이단이라 판단했던 것은 그의 주장 때문이다. 그의 주장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자연발생적 우주생성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라는 종교적 교리와 신앙생활에 대한 매우 개방적인 태도이다.

  메노키오는 마치 치즈가 숙성하는 과정에서 구더기가 나타나듯이, 태초에 모든 생명체들이 생성된 것도 이렇게 우유처럼 뒤엉킨 물질 덩어리로부터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인 ‘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의 독창적인 천지창조설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는 ‘혼돈’의 우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들이 신의 개입에 의존하지 않고 ‘무질서하고 거대한’ 물질로부터 탄생하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그의 세계관은 “유물론적이며 과학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p.193)

  또한 예수는 단지 위대한 예언자일 뿐이라고 말했으며, 자기가 터키인이 아닌 기독교인인 것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지 다른 종교가 틀렸기 때문은 아니고, 성사는 사제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종교적 관용을 역설하여, 교리로부터 자유로운 단순화된 종교의 이름으로 모든 종교의 신앙이 동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모마리아가 처녀일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식인 풍습 등 문화 상대주의의 충격을 받고 내세를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메노키오는 환경과 경제적 기반이 다른 경우 다른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판자들은 이러한 메노키오의 주장들이 당시의 개혁적 지식층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즈부르그는 그 재판기록을 면밀히 검토하고 메노키오가 읽은 책들의 내용을 그의 주장과 하나하나 대조한 끝에, 메노키오의 이야기가 엘리트 문화로부터 그냥 배운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나름의 고유한 기반 위에서 스스로 가치를 ‘생산’해 온 민중문화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또한 그 물질주의적 우주생성론의 뿌리를 고대 인도의 베다 전통과 고대의 우랄 알타이계 샤머니즘에서 찾아낸다. 메노키오는 읽은 책들을 그의 방식대로 독창적으로 재구성했다. 이는 “지식인들의 논점과 민중들의 논점이 접목된 것”(p.178)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메노키오는 심문 과정에서 시종 당당하며 어쩌면 교만하기까지 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는 독창적이며, 인간은 생각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판단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이 어디서 왔으며 누구에게 배웠는가라는 물음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고, 다른 이단 종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자 역시 메노키오가 루터파나 재침례파와 유사성은 있으나 그들의 입장을 따른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다른 맥락에서 교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메노키오에게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평등성을 강조하게 된 근대성의 씨앗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권력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대립관계, 즉 계급갈등을 상정하고 있었으며, “교황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권력, 즉 좀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p.102)라고까지 주장한다.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가 기존의 계급 질서를 비난한 것은 단지 억압을 인식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정신’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종교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다.



3. 작은 것들의 역사, 민중의 역사를 발견하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미시사 방법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진즈부르그는 기독교적 우주관과 합리론적 세계관의 충돌이라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민중의 능동적인 문화 생산과 전승’이라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켰다. 즉, 메노키오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민중들 나름대로의 문화가 그 배후에 존재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를 통해 기존에 문화에 대해 수동적 수용자의 위치에 있던 민중의 위치를 능동적 생산자로 상승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메노키오는 미치광이로 취급받아 결국 죽음을 맞이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근대의 여명을 감지한 인물이었다. 그와 같은 인물이 등장할 수 있던 것에는 종교 개혁과 인쇄술의 보급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한 변동은 문화를 특권으로 간주하는 관념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p.197)

  『치즈와 구더기』의 메노키오는 방앗간 주인으로, 사실상 민중 문화를 대표하는 농민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미시사의 사료가 거대하거나 대표성을 갖는 정형이나 전형이 아니듯이, 메노키오 역시 틈새와 간극의 인물로서, 상층 문화와 민중 문화가 교류하는 경계에 놓인 인물이다. 이 경계 사이로 드러나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둘러싼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역사적 구조체를 추적해나가는 것이 미시사의 특징이자, 진즈부르그의 실마리 찾기 방식인 것이다.”(p.57) 그를 그 시대의 ‘전형적인’ 농부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문화와 계급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기록들의 거의 대부분이 지배계층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고려한다면, 단지 부분적이고 왜곡된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다른 것의 잠재된 가능성(민중 문화)을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시사 역시 정치∙사회사 등 거시사의 발전이 없었다면 이러한 연구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역사는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친 관점에서만 연구되었기 때문에, 그에 가려진 역사들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게 해주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시사적인 연구 결과를 거시사와 비교한다면 때 더 생생한 당시의 삶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거시사와 미시사 혹은 사회사와 신문화사는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 역할을 한다. (실제로 『치즈와 구더기』의 7장 “고색창연한 사회”에서는 당시 프리울리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어, 당시 민중들과 메노키오의 사상∙행적에 대한 추론을 충분히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당시 생활상이나 교육 수준 등을 설명해주어 그 시대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결국 ‘다양한 관점에서의 역사보기’는 우리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